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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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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6-10-25 10:05 조회 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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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라면 불편한 진실을 대하고는 합니다.

신앙에도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는데 바라던 일 보다 갑자기 그 반대되는 일이 생기면 어떨까요?

 

1)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어떻게 알까요? 아니 그 보다는 살아계심을 어떻게 알까요?

바람을 볼 수는 없지만 바람의 부는 강도와, 나뭇잎이 날리는 방향을 보아 알 수 있듯이 하나님도 그처럼 알게 하셨

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과시간의 창시자이시기에 만물의 질서와 법칙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지혜를 계시하고, 함께

계심은 여러 징조로 증명됩니다.

불과구름으로,, 때론 말씀으로,,질서로, 때론 치유와 전쟁에서의 승리로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침묵도 하십니다.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

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려면 눈 크게 뜨고 찾아야 하고, 만나려면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나 종합적으로는 세상과 성경과 역사를 보면 정확히 알 수 있고,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데 유다를 선봉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유다는 야곱과 레아의 셋째아들의 후손 지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함께 계심으로 가나안산지를 점령하는 승리의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조상적부터 하나님이시며, 함께 계심이 온기와 체감으로 생생했던 만큼,

새삼 하나님의 존재나 함께 계심의 대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삿1: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이 손에 넘겨주시니 그들이 베섹

에서 만 명을 죽이고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어느 날 산지 주민들은 쫓아냈지만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병거가 있어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능력이 철 병거 앞에서 힘을 잃은 모양 같습니다.

과거 하나님께서 함께 계실 때에는 어땠나요?

광야40년 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렸으며, 요단강물이 쌓아져 건넜고, 여

리고성은 함성으로 무너트려 입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껏 주변의 여러 족속들을 무찌르는데도 형통했습니다.

그러나 ‘산골짜기 주민의 철 병거’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신 구원의 역사가 작동하지 않았다니,, 이상한 일

이 되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도 침묵하셨고, 유다지파는 물론 어느 누구도 묻지도 않았기에 아직도 모를 일로 남겨졌

습니다.

삿2: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

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지만 “산골짜기의 철 병거”를 어쩌지 못한 체, 유다지파역시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철에 대한 알레르기나 아님 철 병거에 대한 두려움이 컸을까요?

여기에 일반적인 성경해석학에서는 유다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탓’ 이라고 합니다.

 

불신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무지해서의 불신앙, 또 너무 잘 알아서의 불신앙,

전자는 강팍하거나 무지와 어리석음이 이유라면, 후자는 하나님을 과신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전자는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드려야 하고, 후자는 하나님을 다시 알아야 합니다.

 

만약 유다가 과신한 불신앙 탓이라면 지금껏 가나안 정복전쟁을 치르고 온 만큼, 지금도 또 알아서 다 해결해 주실

줄 믿었다면 좋은 신앙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상전이 되어 하나님을 부리는 신앙이고,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신앙인 것이었습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산골짜기 철 병거”도 물리치지 못한 허약하고 안일한 지파요, 신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불신앙 탓으로 침묵하셨으며 쫓아내지 못한 것일까요?

 

2) 하나님의 침묵

그동안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은 유다가 완전하고 잘해서 함께 계심이고 승리일까요?

물론 하나님은 앞서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며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군대다운 기상이고 하나님백성다운 기백이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은 후 그렇지 못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신 칭찬이나 책망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칭찬이요, 책망이라 믿습니다.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부자 보다 두렙 돈을 넣은 과부를 칭찬하셨고,

무화과 나무아래 앉아 하나님나라를 생각한 나다니엘 보시고 “참으로 이스라엘의 사람이라”며 칭찬하셨고, 자신의

종이 병 낫기를 간구한 로마백부장에게도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면서 칭찬하셨습니다.

 

책망은 어떤가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보시며 “독사의 자식”이라 하셨습니다.

여론을 듣고 칭찬하시고, 책망하심이 아니라 직접 보신 소감으로 칭찬과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에서도 유다의 잘 잘못을 뼛속부터 보셨을 줄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의 불신앙을 이유로 하나님께서 고의적으로 무찌르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라면 우리는 그 앞에 설 수도 없고 그 이름을 부를 수도 없습니다.

되레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할 때 붙들어 주시고, 깨닫게 하시며 믿음으로 살도록 인도하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자칫 여기서 불신앙과 망령됨이 나타납니다.

이 때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함께 계심은 물론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됩니다.

마귀의 역사인데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람처럼 쉽게 여기고, 우리식으로 쉽게 대접하는 무례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창조주이신 구원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성도라도 여전히 죄악 중에 있는 티끌 같은 존재

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역시 고난 중에만 찾고, 형통할 때는 외면하는 신앙은 한갖 종교적이므로 여기서 벗어나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더라도 빛 가운데로 가야 합니다.


3) 더 나은 은혜

최근 한 사진이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12세의 야구선수이고 투수였습니다.

경기시작 마운드에서 모자를 벗어 가슴에 대고 혼자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라 우러러 나온 자발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목사신데 아들이 2년 전인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답니다.

체격이 작아 골리앗과 다윗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경기 전 기도하기를 권했는데 내성적인 아들이 이처럼 곧 실행할

줄을 몰랐답니다.

 

성도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빛의 사자들이고 등경위에 놓이는 존재들입니다.

그 등경위의 자리가 그냥의 자리가 아닙니다.

이 자리는 구하면서 그 자리의 값, 그 역할의 값을 외면하면 우리는 불신앙이 됩니다.

이러한 한 때 마귀의 역사도 나타나 불평과 불만과 하나님의 대한 섭섭함이 들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면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나?” 이런 경험을 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아래의 본문 말씀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며 의미를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삿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병거

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철 병거가 없는 산지 주민을 쫓아낸 것도 하나님이 함께 계심의 은혜였습니다.

또 지금껏 모든 물리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철 병거를 물리치지 못함도 섭리요, 은혜가 아닌가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으로써 물리치는 것만이 절대적이 것이 아니라, 물리치지 못한 것도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파괴 되지 않고 보존된 이 철 병거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몇 대인 줄은 알 수 없지만 나중에는 유다의 진중에 들어왔을 것으로 믿습니다.

흔히 먹물이 번지거나 물감이 튀면 작품을 망쳤다면서 불평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는 성숙한 신앙은 이 때 새로운 작품을 기대합니다.

이 기대에서 생각 나의 잘못이면 고쳐지고 아니면 더 확장되는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잘 알아야 잘 믿고, 잘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나타납니다.

다니엘이 이처럼 하나님을 잘 믿었기에 사자 굴에 던져지면서까지 좋은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의 고백이길 축복합니다.


결론) 이러저러한 불신앙은 하나님을 판단하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럴거야!” 하면서 주님을 자신과 시대와 세상에 맞추는 일은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불변하시기에 오직 믿음의 주가 되신 주님께서 가신 길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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