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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전을 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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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4-12-08 07:54 조회 10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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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이 6월이냐” 고 묻는 신세대들을 위해 새 한글성경을 만들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는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배우지 않은 증거입니다.

주님은 어렸을 때부터 성경중심이셨기에 지금의 유월절에도 성전에 계셨습니다.

오죽하면 제자들도 인정했을까요?

요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 사랑으로

어떤 행동이든 그 동기에는 여럿일 수 있습니다.

절실함이든, 의무든, 무서움이든, 사랑이든,, 다 비슷해도 조금만 살펴보면 아주 다릅니다.

유월절에 성전에 계셨던 주님은 화를 내셨습니다.

사랑이 있으셨기에 불의에 분개하신 것입니다.

거룩한 분노,,성전인 아버지의 집이 강도의 굴혈이 된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큰 명절인 유월절을 맞이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까요?

동물로 제물을 드려야 하니 집에서부터 데리고 올 수 없어 성전근처에서 사야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인들의 호객행위와 동물들의 울음과 냄새를 갖고 성전 안으로 들어왔으니 어떨까요?

또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는 환전을 해야 했습니다.

당시 드라크마인 로마 돈으로는 성전 세를 드릴 수 없어 세겔이라는 유대인의 돈으로 환전해야 했고, 

또 그 민간인 돈을 종교용 돈으로 비싸게 환전했으니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손실이 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익은 대제사장한테 들어갔으니 제사보다 젯밥에 마음이 큰 타락이었습니다.

 

낙후된 국가에서는 자국민들 보다 여행자들에게서 입장세나 이용료를 많이 더 받는 경우가 있고 심지어 외국인전

용 돈이 있기도 합니다,

이런 나라일수록 통행세를 받거나 주유소 사업들은 권력자들이 소유해서 부패의 극치를 볼 수 있는데 이 성전에서

그랬던 것입니다.

얼마나 이런 일이 내려왔을까요?

그동안 아무도 항거하거나 개혁은 말도 못했는데 주님이 최초로 지적하시며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아버지에 대한 사랑, 백성들의 대한 사랑, 성전사랑이 컸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보면 사랑이란 이름으로 분노와 시기와 질투 또 전쟁까지 미화시키는 일이 많습니다.

대체로 내가 아닌 상대에게 희생을 강요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상대가 아닌 내가 희생하는 일이기에 가짜와 진짜가 구별이 됩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는지 요즘 싸우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목사님과 교회를 사랑한다면서 교회 수호파,,

반대하면서는 교회 개혁파 등으로 나누어 법정은 물론 몸싸움도 심하게 합니다.

흔히 성장통일 수도 있다지만 결코 사랑은 아닙니다.

상처가 나는데 어떻게 사랑인가요? 사랑은 상처가 아물어야지요.

그런 곳에는 재산에 대한 집착,,자신의 아집 아니면 다른 뜻이 숨어있어 위선이며 비굴하기도 합니다.

 

2) 온유와 겸손으로

주님을 보십시오.

분노하셨지만 상대에 대한 분노의 정도와 방법이 적절했습니다.

이를 “온유하다” 하는데 사랑과 겸손의 열매라서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온유하지 못해서 분노가 지나치거나 부족하거나,,아니면 상대가 잘못되거나,,

그래서 “남대문서 뺨맞고 동대문에서 화풀이 한다”는 말처럼 되어 후회가 많게 됩니다.

 

우리 대통령이 버럭 화를 잘 내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모세도 버럭 화를 낸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알고는 40일 금식으로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 돌판을 던져버렸고.

또 지팡이로 한번 반석을 쳐야할 것을 홧김에 두 번 쳐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달라져서 백성을 잘 인도하는 큰일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

 

사람은 주름처럼 겉만 달라지는 변화가 있고 마음부터도 달라지는 변화도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11:29)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의 쉼을 얻으리니

위의 말씀은 속으로부터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이 화가 많은 이유는 세상이 사나워 공격을 많이 받고 상처투성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달라야합니다.

주님의 생명으로 거듭났기에 주님의 마음을 갖고 성령의 다스림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서당개도 3년이며 풍월을 읽고, 식당개도 3년이면 라면을 끓인다는데,,

이 온유와 겸손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요?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이유는 명석함이나 부유함이 아닌 온유와 겸손 덕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랑으로 의분을 낼 수 있어야 하고,,그 화도 오래 갖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우리와 사뭇 다른 것 같아도 실제는 똑 같아서 위로가 되고 소망이 생깁니다.

사도요한은 별명이 벼락의 아들이었는데,,우리 중에 그런 별명의 사람이 있나요?

그는 사마리아사람들이 주님을 거부하니,,주님한테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 죽이자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벼락 맞을 말입니다.

그랬던 그가 변하여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었으니 얼마나 큰 변화인가요?

이 모습에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가 있지 않나요?

우리도 이 모습이 가능한 것은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께서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골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3) 세워야 할 거룩성

온유와 겸손은 화를 안 내거나 못내는 사람이 아니라 적당한 화를 적당한 대상에게 내는 성품입니다.

*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사람에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양이나 소를 내쫓으시는데 사용하셨습니다.

*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양이나 소나 비둘기를 엎으신다며 웃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비둘기가 아닌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여유가 있고 질서가 있으셨지요?

온유와 겸손은 화를 내는데도 품격을 이룹니다.

 

아시나요?

양복의 품격은 잘 다려진 상의와 하의를 입고,, 양말은 양복 색과 같은 색으로 발목이 보이지 않게 신으며 와이셔츠

소매는 접어서 입어야 하고,,신사의 인격은 친절하고 정의로워야 합니다.

왕손들의 경우 일찍이 왕손의 격을 배우고 훈련해야 했음을 역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또 기사도나 신사도는 의식주라는 생활 속에 다 녹아있는데 성도도 그런 품격의 사람입니다.

 

지금의 주님 모습과 각처에서 이루고 있는 온갖 파업이나 투쟁의 현장 모습을 비교해 보면 폭력적이고 상처투성이

의,,힘과 분노로 하고,,자기 이익만을 앞세운 나머지 마치 전쟁 같습니다.

 

주님의 이런 온유와 겸손의 분노에 주변사람들은 놀랐어도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무섭거나 해치는 걸로 보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회개혁이기 보다는 교회정화였습니다.

요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우리 신앙에서는 날마다 필요한 개혁입니다.

 

결론) 내가 헐어야 하고 다시 일으켜야 할 신앙은 무엇일까요?

목사인 나는 목회매너리즘을 날마다 헐고자 하고 초심을 세우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행복(happy)이나 건강(health) 보다는 거룩(holy)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나님께서 만약 “내가 전능하니 너희도 전능하여라” 하셨으면 어떨까요?

또 “내가 전지하니 너희도 전지하여라” 하셨으면 어떨까요? 결코 못할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는 가능한 주문이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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