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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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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5-07-06 08:05 조회 6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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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무엇이든 아는 지식이 성장하거나 또는 성숙하여서 믿음이 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한 예로 세상에 진짜 산타는 없고 천사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된 데는 바른 복음적 신앙이 들어온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는 성도도 계십니다.

 

1) 제자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주님과 동거 동락하면서 말씀과 각종 이적을 경험한 특별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주님의 눈빛이나 말씀만 척 들어도 무슨 뜻인지 감을 잡으련만 되레 잘 모르기가 부지기였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은유적으로 “잠잔다.” 하셨는데 이들은 실제적 잠으로 오해했습니다.

이에 주님이 다시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하며 분명히 하셨으니,,어떤가요?

이런 학생이라면 유머나 농담도 통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머지않아 저들을 떠나야 하시는데 많이 착잡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제자들을 위해 극단의 처방으로 나사로의 병 듦을 더 확장시켜 제자들을 위한 믿음의 산교육으로 사

용하신 줄 믿습니다.

요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누구나 언제든지 지식이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3가지요소가 절대적입니다.

지적인 확신, 감정적인 신뢰, 의지적인 충동, 물론 시간도 필요합니다.

 

며칠 전 내 어머니를 찾았더니 첫 말씀이 있었습니다.

“세상살이가 이렇게 힘든 것인 줄 또 깨달았어”

 

일본식민지시절에 태어나셨고, 6,25의 처참함과, 군사정권 시절에 가난한 엄마로 6남매를 손빨래로 키워 내신 분이

셨지만 세상살이가 힘들다는 것을 또 깨달으셨다니 순간 울컥했었지만 사는 경험이 짙어질수록 세상살이의 믿음이

실감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밤 ‘엄마의 발견’ 이라는 작은 글을 만들었습니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하였다” 는 이 말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초연한 프랑스연극의 제목이었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제일 힘든 일인 줄 또 깨달았다” 는 이 말은 구십구세인 내 엄마의 며칠 전 말씀이

다.

 

믿음은 자꾸 들어야 하고 자꾸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말세일수록 믿음이 없는 시대가 되는 이유는 듣기는 하는데 실천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신 만큼, 들은 주님의 말씀이 우리 생활에서 거하여 인

격이 될 때 진정한 믿음이 되어 향기와 빛이 됩니다.

 

2) 마르다

이런 모습에서는 여제자라고 할 만한 마르다와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자매였지만 주님을 잘 몰랐습니다.

요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주님을 인간적만 믿는 모습 아닌가요?

“주” 라 했어도 랍비인 정도일 뿐,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지 못한 모습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지 못한 주님을 만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르다를 향해 주님은 믿음의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요1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러나 마르다는 현재적인 부활의 믿음이 아닌,

미래적인 부활을 믿었으니 한갓 부활지식에 불과했습니다.

요11: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아나이다” 는 이 지식이 “내가 믿나이다”로 바뀌어야 살아있는 신앙이 됩니다.

이런 마르다에게 주님은 분명한 믿음의 내용을 계시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의 핵심입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

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이 여러분에게 이처럼 말씀하신다면 어떨까요?

아직 어떤 부활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단순한 위로의 말씀일까요?

늘 듣는 이들을 잘 이해시키고자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던 주님이지만 지금은 진중한 계시를 선포하셨습

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내가 부활시켜 줄 것이다” 가 아니고,

또 “생명을 줄 수도 있다” 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생명이십니다.

모든 만물의 기원이 되시는 생명의 아버지고 키우시는 어머니십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 없는 부활이십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겁을 먹고 죄를 짓는 사람들과, 죽은 자로 인하여 슬퍼하는 지식신앙 앞에서는 부활로 다가 오시

고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현대 기독교신앙의 부실과 부족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부활과 생명을 “내가 믿습니다.” 보다는 행복찾기, 소통하기, 부흥하기, 나누기, 선교하기 등이 주가 되었습니다.

마치 마차가 말을 끌 수 없기에 주님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마르다는 고백이 달라졌습니다.

요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

다

이 고백은 언제나 주님을 믿는 이들의 한결 같은 고백입니다.

 

3) 계속된 믿음

믿음은 계속 자라나는 특성이 있습니다.

또한 건강할수록 확장성도 있습니다.

마르다는 곧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요11: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믿음과 복음이 들어오면 제일먼저 이 특성이 나타납니다.

실제 마리아는 마르다와 같은 신앙수준이었습니다.

요11:32)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생명 있는 모든 생명체는 때에 맞는 동일한 행동이나 증세가 있습니다.

아가들에게는 누구나 구강기 활동이 있듯이 믿음도 그렇습니다.

건강하고 성숙하다면,, 잠잠하지 않습니다.

지식이냐? 믿음이냐? 병들었느냐의 감별성은 여기에 나타납니다.

지식은 교만해서 자기 중심적인 반면 믿음은 작아도 확장성을 갖고 밖으로 나갑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만난 후 제일 먼저 마리아를 찾은 모습만 봐도 그렇습니다.

 

서울은 50년 전에는 산업화로 지방 사람들이 이주해 와 산과 개천가에는 판자 집이 가득했었습니다.

그 때 중량천변에는 한 작은 교회가 있었고 연탄배달 하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 속에서도 비젼 있는 기도를 했었습니다.

확장성이 있어서 “이 예배당을 짓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연탄공장 사장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서원했던 일이 생각나 통장과 도장을 갖다 목사님께 드리고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자칫 그 교회에서 행세하거나 영광을 가로챌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교회당이 지금은 남양주로 옮겨 큰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일반적인 경우와 다릅니다.

일반적일 때 일반적이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요즘 강남의 경우 아파트를 남기고 부모가 죽으면 십중팔구는 형제간에 분쟁이 생긴답니다.

 

결론) 여러분은 어떤가요?

미국성도들은 평소에는 도금한 듯해도 결정적일 때 정금이고, 한국성도들은 평소에는 정금 같은데 결정적일 때는

도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믿음은 어떻게 진가를 발휘하나요?

재물은 물론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고난과 슬픔과 불행을 어떻게 마주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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