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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의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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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5-07-27 07:58 조회 6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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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에서 주님이 함께하신 잔치는 가나혼인집 잔치와 오늘의 베다니에서의 잔치입니다.

물이 변하여 좋은 포도주가 된 가나 잔치는 주님의 공생애전도 시작이었고,

부활한 나사로가 주님 옆에 앉았던 베다니 시몬집에서의 잔치는 공생애전도 마침이었습니다.

 

1) 잔치

가나잔치는 기쁨의 잔치요, 주님으로 말미암는 변화되는 모습의 잔치라면, 베다니잔치는 시몬이 주님의 은혜와 부

활한 나사로를 축하한 잔치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주님의 장례를 위한 엄숙한 잔치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께 향유를 붓자 만류하는 가롯유다를 향해서 주님은 마리아를 지지하셨습니다.

요12:7~8)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히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

라 가난한 자들은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잔치는 몇가지가 절대적입니다.

기쁨, 주인공, 음식과 하객 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베다니잔치는 기쁨이 없어 보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살기와 주님의 마지막 유월절로서 십자가의 죽음이 짙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위한 이 잔치인 만큼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나사로의 동석입니다.

요12:1)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나사로와 주님은 부활을 증명하는 시대의 증인이고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는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카톨릭교회에서 전해오는 격언이 있습니다.

“슬픈 모습의 성인이 없고, 기쁜 모습의 마귀도 없다.”

기쁜 사람이 기쁨을 전해주고 화난 사람은 화를, 짜증난 사람은 짜증을 전해줍니다.

주님 곁에 앉은 부활한 나사로는 어떨까요?

여하한의 부활의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내게서 나가는 감정이나 인품이나 신앙이나 능력이 상대방에게 반사되어 그렇습니다.

 

부활한 나사로의 존재는 주님 곁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불신의 시대에서 그를 살리신 주님

의 존재와 함께 하늘의 위엄과 영생을 선포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모든 창조물이 그렇지만 하물며 죽었던 자가 부활했으니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시100:1~3)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둘째는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순전한 향유인 고급향유를,, 1년치 노동자임금 값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물질을 드린 것은 앞서 마음을 드린 것이고, 머리털로 발을 씻기었으니 삶을 드린 만큼,

내게 있는 것을 아낌없이 주께 드린 최상의 경배인 줄 믿습니다.

 

주님께 이런 일이 왜 있을까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없는 일 아닌가요?

저들은 인성과 신앙이 덕성을 이루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서 삶이 없으면 존경도 칭찬도 없습니다.

주님이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하심은 성도에게만 주어진 신분인줄 잊지 말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의 역할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2) 어린 나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직업신앙인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죽이고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요12:10~11)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으니라

이게 마귀의 특징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기만 해도 자기 배가 아프기에 상대를 쉽게 공격하며 망하게 합니다.

 

잔치집에서 주님과 함께 있던 나사로는 장차 어떤 흔적이 없게 됩니다.

이쯤되면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배우는 제자가 될 법한데 그렇지도 않았고,

아님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동역자로 나올 법한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이상합니다.

역사가들은 잔치 후 주님이 승천하신 후,,공관복음이 다 기록된 후에 부활이 없다고 믿는 극

렬한 사두개파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거라는데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과 나사로를 자신들을 망하게 하는 원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은 성향과 기질이 정복하며 확장해야 만족하는 편이라서 어린 나귀보다는 백마나 큰

숫말을 선호하기에 세상은 이런 이들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린나귀를 타신,,

온유와 겸손하신 왕이셨기에 붉은 옷이나 누런 금관이 없으셨습니다.

이는 섬기려오셨고, 자유를 주시며,,구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도의 성향과 기질은 누구를 닮나요? 나는 어떠한가요?

왜 온유하고 겸손한 자를 가리켜서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셨을까요?

힘나 칼이나 전쟁이 아닌 주 다스림의 나라가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3) 가롯유다

베다니잔치에서는 주님의 위한 일에 마리아의 반대적으로 가롯유다를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그도 마리아처럼 주님을 지근거리에서 섬기고 배우던 제자였습니다.

돈 궤를 맡은 만큼 이재가 밝은 제자였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아 마리아처럼 주님께 드림은 없고 되레 훔쳐갔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가난한 이웃은 구실이고 실제는 자기사랑이 큽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를 폭로하고 기록에 남기셨습니다.

요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마귀가 그를 선택해서 주님을 배반하도록 한 이유가 됩니다.

믿음과 사랑은 없고, 오직 돈을 사랑하는데 진심이라서 그렇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데,, 그는 자기 영혼을 마귀에게 팔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태어나지 않았음이 더 좋을 뻔했던,, 주님을 위한 잔치의 불청객이었습니다.

대다수의 독재자들이 인민을 위하고 백성들을 위한다지만 명분이고 허울인 것은 자신을 위한 착복의 군주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삶으로 향기가 되었다면, 가롯유다는 도둑이라는 불명예와스승인 주님을 판,, 배

반이라는 더러움이 오물처럼 진동하게 되었습니다.

 

둘 다 주님 곁에 머물렀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었고 결국은 달랐습니다.

그 차이가 마침내 천국이며 지옥인 줄 믿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주님에 대한 지식이고, 믿음의 차이인 것입니다.

요12:25~26)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

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

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리라

 

세상은 언제나 주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살기가 등등하고 부활을 거부하는 불신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주님을 위한 잔치를 베푼 시몬과 향유를 바친 마리아와 같은 성도가 소수로 있

고, 당을 지어 주님을 박해하는 바리새인들과 주님을 믿노라하면서 실제는 주님을 배반하는

엑스 맨인 가롯유다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설 때와 주님의 날이 가까울수록 확연히 드러나는 줄 믿습니다.

 

결론) 내게 귀한 것은 대체로 세상에서도 귀한 것입니다.

이 귀한 것이 무엇인가 보다는 어디에 사용하나 가 더 중요합니다.

주님께 드림이 있고 자신이 착복함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한 잔치를 베푼 시몬과 좋은 향유를 드린 마리아와 그렇지 않고 되레 훔쳐가는 가롯

유다가 여러분의 자녀라면 누구에게 마음이 갈까요?

또 친구라면 누구에게 속내를 말할까요?

 

하나님이 천국의 열쇠를 누구에게 주어야 공정한 하나님이 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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