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사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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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신께서 자유도 주셨다 ”
이는 워싱턴 DC의 제퍼슨 기념관 벽면에 새겨진 글입니다.
이 글의 메시지는 서로를 ‘신의 자녀’ 로 인정한다는 것이며,
자유는 개인이든 정부든 빼앗지 못하고 누리는 만큼 책임이 있다는 엄숙한 선언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신적권위에서, 자유는 진리라는 터전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이를 잃으면 사람의 존엄은 없어지고 자유는 방탕과 방임이 되기 때문입니다.
1) 많은 사람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사고를 합니다.
유감되게 현대는 인문학이나 철학 보다는 이학이나 공학이 각광을 받습니다.
이는 훗날 과학 세상을 이루었지만 인생허무를 느끼기 쉬운 구조입니다.
또 신을 찾는 사고와 신은 없다는 사고,, 둘은 너무 다릅니다.
이 사고의 자유역시 기필코 책임이 따릅니다.
보십시오,
무얼 먹고 어떻게 사느냐는 자유지만 결과는 건강이나 병으로 나타나지 않나요?
그러므로 성향이 왼쪽이냐 오른 쪽이냐로 미래가 다르고,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다” 와 “영생이 있다” 도 전혀 달라 출발선부터 달라집니다.
공연 예술을 봅시다.
감독이 중심인 예술은 영화이고, 관중이 중심인 예술은 연극이며,
배우가 중심인 영화는 오페라입니다.
그런데 이 공연도 존재냐 소유냐로 울고 웃습니다.
그래서 오직 재미,,흥행에 목숨을 걸고 보니 작품성은 사라집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제사장 중심은 유대교이고, 신 중심은 힌두이고, 법당중심은 불교이고, 사제중심은 카톨릭이고, 성령중심은 기독교
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고에서 나온 것이고 혹은 신의 계시에서 나왔다지만 대체로 일반화되었습니다.
풍동의 교회가 30군데, 천주교 1곳, 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차별과 달라짐이 없습니다.
목적은 잘 사는 일이고 메시지나 기도도 내 후손들까지 “잘 살게 도와주옵소서” 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은 먹고 살만 하면 찾지 않게 됩니다.
법을 공부한 전문인들을 봅시다.
지금도 법정에서는 치우침이 대세이고 그 뒷편에는 역시 보이지 않은 힘이 작용합니다.
그 결과 지난 정권에서는 검사들이 득세했고,, 지금은 변호사들이 득세했습니다.
1심은 유죄인데 2심은 무죄가 나올 수 있는 법이라면 웃기는 법이 아닌가요?
오죽하면 검찰을 개혁한다면서 검찰청을 없앨까요?
정치인들은 어떤가요? 온갖 권모술수에 치사하기 그지없고,
공직자들 역시 지위를 떠나서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고로 근태는 엉망이고,, 이해에 따라 움직일 뿐 진리를 따
라 움직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흐린 날은 볕이 없고 구름이 많아 자연 습도가 높습니다.
맑은 날은 그 반대라서 몸도 다르게 반응해서 찌뿌둥한 게 없다고들 합니다.
이렇듯 시대에 악이 성행하느냐,,악이 그쳤냐에 따라 경건의 시대냐 불경건의 시대냐를 가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부류가 많으냐가 관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천기를 분별하면서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느냐 하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2) 적은 사람들
본문은 유감되게 주님을 붙잡고 죽이려는데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주님을 신성 모독자로 목적을 세웠고, 붙잡는데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그리고 유대교의 종교문
제에서 죽일 수 없으니 로마 정치범으로 만드는데 안나스 현 대제사장과 그의 장인인 전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나오
고, 이제는 로마의 법정에 세우는데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 한 사람, 문지키는 여자들, 죽다 살아 난 강도 바라바,
주님께 채찍질하는 군인들,,마침내 죽일 죄를 찾지 못했어도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유대교에 친화적인 정치
를 펼치는 빌라도총독 등이 동원됩니다.
이 일에 총감독은 누구일까요?
요19:36~37)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꺽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반면 이들과 전혀 다른 적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요19:38~40)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
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
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
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쌌더라
이들은 고위공직자고 선생이었으나 평소에는 침묵하였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 주님 편에 섰으니 참 믿음이요, 희생이 따랐으니 사랑입니다.
주님께 해하던 대제사장들과 그 측근들도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처럼 당시의 지성인이고 교양인이며 종교적
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멋진 말,, 가슴을 울리는 말을 했었지만 말 뿐이고 삶은 없었습니다.
요즘도 이런 말과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시끄럽습니다.
요18: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더라
요18: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우리는 누구와 같나요? 우리의 말은 울리는 꽹과리가 아닌가요?
차라리 주님을 붙잡은 말고의 귀를 검으로 벤 베드로의 행동이 좋지 않나요?
아님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어 베드로를 대제사장 집으로 인도해 들인 한 제자,,곧 요한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요?
요18: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 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
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3) 생명과 은사
나방과 나비는 비슷해도 생명이 다른 이유는 다른 용도의 목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성도는 어떤가요?
첫 생명인 육체의 생명도 하나님이 주셨고, 또 거듭남이 새 생명도 하나님 주신 줄 믿습니다.
이는 죄와 사망과 세상을 이기는 생명과 거룩한 자유자로써 주님의 예배자와 증언자로 세우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소명은 직업과 은사 안에서 내 가정과 이 시대의 소금이고 빛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모든 교육의 목적은 돈 잘 벌고 잘 먹고 잘 사는데 있다면 유감입니다.
소는 누가 키우나요?
일찍이 이런 교육 탓에 아이들이 정신과를 다니고 상담소를 다니는 일이 증가했습니다.
또 입대 후 1년 안에 현역부적합자로 전역하는 청년들이,,특히 정신질환자와 심리적 요인으로 전군에서 매년 증가
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올해도 4250명이 달했다니,,어릴 때의 가정교육이 무관 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목적과 목표가 달라져야 합니다.
이런 질환은 어려서부터 과도한 공부나 입시교육 때문은 아닌가요?
아무리 배우고 익혀서 출세해도 하나님을 모르고 주님을 대적하면 약도 없습니다.
출세해도 주저앉고 때론 끌어 내려집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면 주님이 높이시고 붙잡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역사의 흥망을 주도 하시는 총감독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면 무엇하고 총독이면 무엇 하나요?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택하신 족속이요, 세우신 나라이기에 많은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곳을 찾을 때 낮은 곳, 부함을 찾을 때 심령이 가난함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매일 “주시옵소서” 의 기도가 아닌 “내가 무엇을 할까요? “어디를 볼까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 어떤 생닭 장수는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해 거래처에 미리 닭을 준비하라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거래처가 많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웬걸 갑절 이상으로 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단순히 주일을 지킨 일 보다는 앞선 삶에서 신뢰를 얻은 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사람에게서 이런 신임을 받나요? 받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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