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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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얼마나 당했느냐 따라 사람은 달라지곤 합니다.
전쟁으로 평생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거나,
또는 가난과 무식이 그 사람을 괴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이 그 사람의 진정성은 아닙니다.
후천적 무늬로써 치료나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본성으로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부모와 부모역할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진정성이고 그 진정성은 자연스러움입니다.
부모라는 성품이 부모노릇 하는 자와 다른 질적 차이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1) 니고데모,
니고데모는 유대인이었고 선생이었습니다.
당시 미운털인 예수님을 더 알고 싶었지만 주변시선 탓에 밤에 주님을 찾아왔던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새로운 진정성, 새로운 본성이고 천성인 거듭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듭나야 하나님나라를 들어 갈수 있음도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때 니고데모는 으아해 했습니다.
“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까요? ”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 일이 그의 변곡점이 된 줄 믿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믿음 없는 자가 아니라 믿음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그의 삶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지금은 공개적으로 주님을 환영하며 그 시신에 몰약과 침향을 바르면서까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장사 지내
게 했기 때문입니다.
요19:39~40) 일찍이 예수께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세마포로 쌌더라
시체를 닦는 일은 힘든 일이고 특히 예수님의 시신을 닦는 일은 부담된 일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나사렛이단의 괴수와 가깝다는 뜻이기에 반유대교적이라서 손해 볼 일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이 일을 누가 시켜서가 아닌 스스로 돈 써가면서 자원한 일입니다.
새로운 본성이 세상보다는 주님을,
자신보다는 주님을, 사람들을 의식하기 보다는 천국을 소망한 이유인 줄 믿습니다.
이 본성은 세월이 가도 변질하지 않고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내 성품이지만 내가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품은 종교성은 있어도 결코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 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어떤가요? 니고데모와 같은 모습이 나오는 것은 같은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남,, 거듭남에는 전에는 없던 새 성품으로,, 하나님께 대한 억지가 없습니다.
새 성품은 사람에 대한 친절도 억지가 아니고, 책임감도 명령 없이 스스로 움직이며, 배려도 계산하지 않은 몸에 밴
습관으로 움직입니다.
꾸밈의 연기하고는 전혀 다른 천성이고 습관이어서 그렇습니다.
곧 새 인품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성품의 성도가 줄고 있다는 사실로써 기독교의 변질이 되고 있습니다.
전10:1)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
2) 자연스런 출생
거듭남은 억지가 아니기에 억지스러울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임으로 부는 바람처럼 임의로 하시는 거룩한 영적 출생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거듭남의 성도는 복음을 전도하고, 또 듣는 사람은 열린 마음으로 들으면 그때 성령께서 임의로 결정하셔서
부르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보혜사로 내주하십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사람의 방법과 세상 방법으로 사람을 모으니 교회가 커도,
성도가 많아도 부자연스럽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유대교가 그랬습니다.
국교였고 전 민족이 신앙인이었습니다.
제사장과 그 가문은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민족전체가 눈 멀고 귀 멀었습니다.
하는 짓은 마귀의 짓을 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별한 은혜가 당연시 되었고, 결핍이 없이 타성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주님이 “회칠한 무덤이라” 하셨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령을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율법을 따라 살아서 그렇습니다.
이런 중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확실한 영의 사람인 것입니다.
요3:6~7)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당시 유대교는 종교적이고 비성경적인 사탄의 회인데도 자칭 거듭난 줄 착각했었습니다.
현대의 기독교가 그럴 수 있습니다.
그 구별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요3:20~21)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
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다른 말로 빛의 열매입니다.
“모든 의로움과 진실함과 거룩함이” 있는,,. 열매는 진정성입니다.
장식하고는 달라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고 저숙함과 성숙함도 알 수 있습니다.
3) 열매
나는,, 우리는 어떤가요? 열매는 있나요?
평소의 무슨 생각을 하나? 어떤 말을 하나? 어디에 관심이 있나?
주님에 관한,, 천국에 관한, 주변 영혼에 관한,, 간구는 무엇에 있나? 점검해야 합니다.
흔히 “ 3일을 굶으면 남의 담을 넘는다. ”고 하는데,, 진리입니다.
그럼 내 영혼이 영적인 일에 관해서 굶으면 어떤가요?
갈급함이 있어야 좋은,, 건강한 영혼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유학을 마치고 큰 교회의 부목사를 거쳐 소도시의 지교회 담임목사로 위임되었습니다.
400명 남짓 교회가 1년 지나니 1000명이 되고, 2년 지나니 2000명되고,, 3년 지나니 3000명이 되었습니다.
이 때 목사님은 10000명 교인을 꿈꾸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한 교인이 임종하는데 목사님이 복음을 전했더니 “아멘” 하기에 “성도님은 구원 받았습니다” 하며 가족들에
구원을 선포하고 왔답니다.
그 후 마음에 책망이 “네가 무엇인데 구원을 받았다는 등의 말을 하느냐” 였습니다.
결국 목사님은 자책 속에서 잘못을 깨닫고,
숫자에 연연한 양적 목회가 아닌 질적 목회자로 거듭났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 일이 목회의 목표가 돌아서는 변곡점이 된 것입니다.
결론) 목회하는 목사님도 이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반 성도는 어떨까요?
주님이 말씀하신 빛의 열매보다는 자신이나 사람들이 세운 기준에 맞추고 자칭 의인화합니다.
“나 어느 교회 다녀” “나,,헌금을 얼마 드려” “나,, 몇년 다녔어”
현대판 바리새인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변곡점은 있나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은 이 일이 가장 큰 변곡점이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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