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증인
페이지 정보
본문
며칠 전 수원의 목사님이 별세하셨기에 조의금만 보내고 사모님께 위로 문자를 보냈습니다.
별세한 목사님은 잠잠해도 남겨진 산 자들은 슬픔 중에도 분주하고 피곤함을 생각했습니다.
1) 무덤 밖에서
주님의 죽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더디 믿은 만큼,
주님의 죽음을 슬퍼하므로 무덤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최고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 돌이 옮겨진 것을 발견했고,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달려가 알렸던 장본인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빈 무덤의 첫 증인입니다.
또한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물론 무덤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이 별세해서 울고, 무덤이 비어져서 또 운 것으로 보아 3일을 운 울보였습니다.
여기서 주님에 대한 사랑의 척도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만큼 슬프고, 사랑만큼 울고, 사랑만큼 무덤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의 기원은 주님이 먼저 그 여인을 사랑하신 덕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누군가요?
복음서에는 여럿의 마리아가 등장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로 구별하는 이유는 고향이 갈릴리 막달라 출신이라서 그렇
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기생이었던 이 여인이 주님을 만나 회심했고, 주님을 사랑하며 따르는데 1등인 만큼 주님의 죽
음과 부활을 다 목격한 영광의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지 카톨릭에서는 성녀로 추앙하고, 특히 동방정교에서는 부활절 후 제 2주일을 ‘몰약을 든 여자들의 주일’
로서 막달라 마리아를 기념합니다.
이 마리아가 무덤 밖에서 울면서 서성이다가 신기한 일을 겪었습니다.
요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였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
두 제자들도 만나지 못했던 천사들을 만났습니다.
마가복음은 두 천사가 아닌 한 천사로 기록했습니다.
막16:5~6) 무덤에 들어가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며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 하느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그리고 그 천사는 주님께서 이미 그곳을 떠나셨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 차이는 무엇인가요?
창세기에 비슷한 사건이 있습니다.
여정을 멈춘 아브라함이 어느 날 정오에 장막에 앉았다가 지나가는 나그네 셋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달려가서 자기네 장막에서 쉬어가기를 간청했고 그들은 응락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소돔성을 향해 가시던 하나님과 두 천사였습니다.
지금 주님 무덤 안에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두 천사라지만 부활하신 주님과 천사 한 분일 수 있습니다.
그 무덤에서 나누었던 상황과 말씀이 놀라웠던 만큼 앞뒤 맥락이 뒤바뀔 수가 있습니다.
마치 비상계엄의 증인들이 계엄 당시의 말과 행동들이 다르게 기억된 이치입니다.
2) 마리아
중요한 것은 주님을 찾는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기다리셨고 만나주신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눈물, 기다림, 슬픔으로 이어지고 또 찾음, 인내,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요20: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마리아는 울면서 주님을 찾느냐고 주님을 못 알아보고 동산지기로 착각했습니다.
요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님은 그리고 하나님은 마리아처럼 간절히 찾고 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줄 믿습니다.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
라)
주님은 마리아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여자여” 할 때는 마리아가 몰랐으나 “마리아야” 하시므로,,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에 화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일은 유효한 줄 믿습니다.
사람은 생물이지만 인격체이고 하나님형상으로 지음 받은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추, 꽃 -
이 믿음으로 우리역시 주님을 간절히 찾고 그 이름 불러야합니다.
또 주님이 내 이름을 아시고 부르시며 생명책에 기록하셨음도 믿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믿는 우리는 성령의 지혜로 주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
도하여 내느니라
3) 부활의 몸
성도의 부활의 모습은 주님이 모델이십니다.
주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라서 그렇습니다.
부활의 몸은 어떤가요? 죽기 전과 큰 다름이 없었습니다.
* 인지 능력이 있습니다.
(마리아야 하고 이름을 부르심은 물론 마리아에게 지시하심, 그러나 붙잡지 못하게 하심을 보아 성결해
야 함)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
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께로,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 성령을 주십니다.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미처 몰라보았으나 못 자국과 창 자국은 확실했습니다.
또 말씀하셨고, 잡수셨으며, 공간을 초월하셨고, 이적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계속 나타나셨으나 그전처럼 제자들과 동행하시지 않으셨음이 다릅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과 제자들과 경계가 있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무덤이 종착지가 아닙니다.
죽음과 무덤을 너머 천국과 영생으로 나아갑니다.
“ 내가 신이다 ” 라고 외치는 신앙이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된 줄로 믿는
신앙입니다.
이들은 죽음에서도 자유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현대의 성도들은 죽음직전에서 멈추고 있습니다.
결국 살아있는 동안의 행복, 건강 형통. 편안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이나 고통이 오면 화들짝 놀라 원망, 불평, 포기가 많습니다.
결론) 주님의 부활은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내게도 마찬가지인줄 믿어야 합니다.
남의 죽음은 그의 무덤 앞에서 슬퍼해도,
나의 죽음은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
으며
혹은 “ 주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계22:2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