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시라
페이지 정보
본문
세상 모든 것에는 어울리든 아니든 저마다 불리어지는 이름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나사렛출신 예수를 “주님이시라” 했습니다.
베드로는 두렵기 보다 반가웠기에 “주님이시다” 라는 말을 듣고 바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1) 주님이시라
여러분은 누구에게 이처럼 민첩하게,,뜨겁게 반응을 하시나요?
아이들한테는 엄마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어릴수록 엄마를 부르면서 그 품에 안기고 그 이름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다르고,,사회인이 되어서 다르고,
엄마아빠가 되어서 또 다르고, 늙으며 더 달라질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자라면서는 친구들이요, 엄마아빠가 되어서는 자녀들이요, 늙어서는 곁의 사람일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처럼 나사렛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성도는 어떨까요?
성도라면 “주여”를 자주 부르지만,,
그 부름의 정도에 따라 관계와 믿음의 성격과 질이 금, 은, 동 흙으로 구별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겉이 아닌 중심을 감찰하시기에 하나님의 평가는 분명할 줄 믿습니다.
이는 누구나 “주님이시다”할 때 자기 내면에서부터의 고백이며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세상 무엇보다 하나님을 으뜸으로 여겼습니다.
대표적으로 주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버지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인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처럼 주문하시고 그런 성도를 곁에 두시길 기뻐하십니다.
마10:37~38)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
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
지 아니하리라
위의 말씀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한편 주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하셨고, 자녀는 물론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일이 당신을 영접하는 일이라 하셨습
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못한 어부들과 세리를 제자로 삼으시고 이들에게 직접 삶으로 보이셨고, 말씀으로 3년을 훈
련하셨습니다.
지금도 세 번째로 나타나심이 바로 이런 뜻이었고 나중에 성령을 보내심이 완성이었습니다.
그 후 제자들은 비로서 거룩한 영향력을 나타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주님말씀처럼 주님을 가장 사랑할 수 있을까요?
결의와 결단에 찬 내 의지가 아니라 성령 충만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훗날의 주님의 제자들이 그랬고 구약의 모든 선진들도 그랬습니다.
성령은 보혜사로써 성도를 성도답게 만드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일과 성인이 엄마아빠를 부르는 일은 다릅니다.
어릴수록 입으로 부르지만,, 클수록 마음과 생활로 부르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 믿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성할수록,, 입술이 아닌 성령 충만할수록 삶으로 주를 따르는 줄 믿습니다.
며칠 전 강릉의 모 장로님이 장로임을 밝히고 강릉아산병원에 2억원을 헌금했습니다.
이 배경에는 강릉의 한 카페 주인과 지역민들이 십시일반으로 1억 500만원이 모아져 의료취약지인 강릉에서의 소
아환자를 외면하지 않는 연대감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 흐름이 지역교회 안에도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침 장로님 큰손주가 태어난 지 2년도 되기 전에 소아암을 판정받고 2년 앓다가 천국으로 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장로님은 자기 손주는 형편이 좋아 치료를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형편의 아이들을 품게 되어 “거창한 결단
이라기보다는 매일 기도 드리는 제목이 행동으로 이어졌을 뿐이라” 며 기부한 것입니다.
이 모습은,,주님의 성숙한 제자의 모습이고, 또 “주님이시다” 는 외침에 베드로가 옷을 두르고 바다에 뛰어 내린 현
대판 모습인 줄 믿습니다.
2) 조반을 먹으라
본문을 보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앞서 뵙고도 변화 없이 다시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 보다 먼저 날이 새어갈 때에 바닷가에서 숯불을 피워 생선을 구우면서 제자들을 기다리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제자들의 형편을 다 아시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요21:5~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더라
어부로서 프로인 제자들보다 바다와 그 제자들의 상황을 더 잘 아시고 대책을 주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이를 가르켜 “상천하지의 주님이시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반을 먹으라” 는 주님의 호의는 밥상머리 교육인 것입니다.
우리의 대다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이에 던졌더니” 가 아니라, “이에 잠잠하였더니” 또는 “배 왼편에 던졌더니”한 후,
주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밥상머리교육의 부재라 할 수 있습니다.
교육과 훈련에는 질도, 내용도, 과정도 많습니다.
귀공자, 귀공녀교육은 철저히 스승중심의 교육이었기에 남달랐습니다.
지금의 종합대학교는 학교중심이기에 학비부터 학생들과 엇박자가 나곤 합니다.
신앙은 어떨까요? 교회가 아니라 가정에서부터 보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아내의 친구가 딸과 손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되돌아가기 전 내게 기도를 부탁했기에 “기도합시다.” 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두 돌도 안 된 내 손자는 두 손을 모았고 기도 후 “아멘” 했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그 집 손자는 “기도가 무엇이냐” 고 몇 번이나 물었습니다.
이때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국가에 살면서 경제도 잘 가리켜야 하고, 세계가 한 지구촌인 세상에서 외국어도 익혀야 하고, 디지털과
인공지능 시대에서 생존력도 높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내가 못해도 대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어떨까요?
삶의 근본인 믿음, 소망, 사랑은 어떨까요?
관계의 근본인 모든 의로움과 진실함과 거룩함은 어떨까요?
결코 대체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제자들에게는 주님을 알아보는 안목과 지혜가 이미 있었습니다.
요2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자가 없더라”
그럼에도 주님을 떠났다가 찾아오신 주님을 의도하지 않게 만났으니,, 유감된 상황입니다.
이 유감된 신앙이,, 왜 주님이 부활하시고도 또 나타나셔야 하는가를 말해 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밥상머리에서 조차 하나님나라를 훈련하고 교육하셨다면,,
말세를 사는 현대의 성도는 어때야 할까요?
지금 미국대통령이 우방을 향해 관세압박을 가해서 기존 질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의 복음적인 교회가 그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이 믿음과, 이 신앙토대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일인데,,온갖 꽃을 많이 피우는 일 보다 조상적부터 피워 온 국화를 잘 피우는 일이 더 큰 가치
라서 그렇습니다.
실용이나 효율이 중요해도 여전한 전통과 기치가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성도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벗도 있고, 교사도 있고, 스승도 계셔야 합니다.
그러나 참 교사와 스승은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히12:2)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에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결론) 금번 동계올림픽에서도 감동어린 성공담이 나옵니다.
승리라는 목적과 목표를 달성하고자 긴 수련과 투혼을 발휘한 결과입니다.
주님이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으심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일,,평생의 목적이고 목표이길 축복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