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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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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5-03-23 09:25 조회 7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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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들은 나름의 반응들을 상황마다 하는데 살아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유대의 사람들은 주님을 싫어하고 거부하며 죽이려 했습니다.

주님의 반응은 갈릴리라는 윗지방에서 다니시고 본고장에서는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요7:1) ~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하심이라

 

1) 반응

이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했나요?

요7:7) ~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주님의 거룩한 지적이 저들이 화를 부추였고,,이 화로 주님이 죽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떨까요?

애당초 저들이 싫어하는 말을 하지 않거나,,설령 저들이 공격해 온다면 적극 해명하고자 더

활보하지 않을까요?

아님 하나님아버지께서 자신의 신변을 보장하시는 만큼 담대하지 않을까요?

요7: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

니라

 

그런데 주님의 반응은 소극적이셨고 조심하셨습니다.

오죽하면 불신자들인 형제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며 주님을 충동 했겠나요?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요7: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명절 중간에도 은밀히 올라가셨고 명절 끝날에서야 적극적인 활동을 이루셨습니다.

요7:37) 명절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유대 사람들이 주님을 죽이려는 반응은 주님에 대한 심한 반발임에 비해 주님은 되레 은밀하

며 잠잠하셨습니다.

오병이어 이적과 물위를 걸으셨던 그 권능으로 반응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첫째 이유는, 주님은 권능은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법인카드는 개인이 사용해도 법인을 위한 목적이어야 하듯이 주님의 능력이어도 목적은 하나

님이며, 자기 백성의 구원이어야 합당합니다.

그런데 주님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 하나님이신 주님께는 가당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들의 사납고 서운한 반응 앞에 “내 때가 아니라” 고 반응하신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온유와 겸손의 주님이 하나님아버지를 온전히 믿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늘과 땅이 분리되었어도 실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이기에 하나님의 법과 질서

를 따르신 것입니다.

주님이 직접 나서지 않았으니 참사람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어느 날 마귀가 주님을 시험하고자 작정하고 주님을 성전꼭대기위에 세우고 “ 네가 만일 하나

님의 아들이면 뛰어 내려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

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 했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심으로 하나님의 법칙인 중력

을 믿고 물리치셨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신 줄 믿습니다.

그러나 때에 대해서 “내 때가 아니라”는 확실성이 있으셨으니 방법만큼은 기다리셨다고 믿습

니다.

이 온유와 겸손을 갖고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찾는 일,, 얼마나 귀중한가요?

우리의 많은 실패는 이 부족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맞으면 하나님의 뜻이고 아니면 하나님 뜻이 아니라고 여기는 무지와 불신이 잠재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유는, 이적을 사모하고 이루는 삶도 훌륭하지만 예측 가능한 평범한 삶도 질서와 법

칙에 순응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약한 듯해도 강하고, 불완전해도 완전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인 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저들이 행한 대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그 최고가 십자가 위에서 “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 하옵소서” 하셨습니다.

 

2) 은사대로

위의 주님모습에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말씀이 곧 주님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은 사자가 나은 가요? 산개가 나은 가요? 성경도 산개가 낫도다 하셨습니다.

죽은 사자에게는 사나움과 위엄이 없지만 산개는 짖거나 꼬리치기에 작아도 개가 죽은 사자를

능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은 사자가 낫다며 사자를 흠모하고 사자가 못되면 그 곁에서 살려고 하다

가 사자 밥이 되곤 합니다.

전9:11)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

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말함이라

 

비슷한 경우 사도바울은 복음에 대하여서 적극적이었기에 주님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 하셨어도 로마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행20: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

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

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구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결국은 순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고집스런 열심을 선교에 끝까지 사용하셨지만 뱀처럼 지혜로웠다면 더 귀하게

사용하시지 않았을까요?

 

모세는 다혈질의 인도자였습니다.

책임감은 좋고 아는 것도 많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민족의 인도자로서는 치명적인 다혈질이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얻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는 화부터 냈던 일을 우리가 압니다.

그 화냄으로 그의 가나안 입성을 하나님은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훗날 성경은 이 다혈질의 사람을 가리켜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자더라” 하였습니다.

주님과 실수와 실패를 통해 본성도,, 기질도 새롭게 된 것입니다.

 

3) 거듭남

이 새로움이 점진적이든 급진적이든,,확실하면 거듭남입니다.

나는 나인데 그전의 내가 아닌 것입니다.

요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내 안에서 육신의 성품이 영의 성품으로 달라짐으로 마음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요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위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영광만 구하는 겉치레의 신앙이고 삶이라면 참된 신앙과 삶은 못됩니다.

그러나 모세와 주님은 이들과 달리 참되며 모세와 주님은 같은 성품인 줄 믿습니다.

인류역사와 기독교 역사를 보면 누가 이겼나요?

유대교가 아니라 기독교였고 유대인들이 아니라 주님이었고 제자들이었고 성도들이었습니다,

 

봄의 기운은 생명의 기운입니다.

남쪽에서부터 올라오고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대지를 감쌉니다.

세상을 이길 힘은 이렇듯 생명의 떡인 주께로부터 오고 하늘에서 감싸집니다.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바닷물의 3%가 염분이기에 97%의 바닷물을 날려야 소금을 얻게 됩니다.

97% 바닷물을 날리는 수고를 하는 이유가 인류에게 꼭 필요한 성분이라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얻는 소금은 음식에 들어갈 때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또 바닷물 보다 적게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 소금이 음식에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 없다’ 고 합니다.

이처럼 티를 내지 않고 모든 면에 맛을 내는 성분이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의 맛’인 것입니다.

 

결론) 맛 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생명의 떡을 먹으면 됩니다.

이 생명이 풍성할 때 그 어디나 천국입니다.

세상은 혁명이나 전쟁으로 세상을 바꿀려고 해도 성도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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