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7:1~10, 나무에 달린 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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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왕후의 "죽으면 죽으리라" 는 각오였기에 왕앞에서 두려움이 없어 자신의 정체성을 들어 냈습니다.
7:4)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빛은 언제나 어두움을 폭로합니다.
그리고 빛은 하나님께 속한 만큼 하나님의 사용하시는 방편이 되어 구원의 은혜를 이룩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인 "죽으면 죽으리라" 하여, 죽었다고 간주할 때, 믿을때, 당당하며 거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두려운 원수는 언젠나 죽음인데, 그 죽음을 맞설 수 있는 족속이 누구인가요?
이미 죽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를 머리로 한 새 족속인 만큼 세상은 이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성도들이 이 모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그리스도인과는 얼마나 다른지요? 현대는 얼마나 비굴한지요? 그래서 죄에 잡혀 비참하게 사는 것 아닌지요?
직장인 예배를 수년동안 운영했습니다. 유명 직장의 신우회 인도와 또 교회당에서 수요예배를,,
대체로 당당한 그리스도인들이 참석했습니다만 그럼에도 자신의 직장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옳바르게 진술하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었기에, 믿노라하면서 쉬쉬하곤했습니다.
딱 두가지 이유였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순전하지 못하여 "하나님 영광을 가린다." 파가 있었고,
다른 파는, 회사내의 불이익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회사의 불이득보단 자신들의 불편이었습니다.
어디든 소수가 다수를 어거합니다.
세상도 소수의 의인이 멸망 받을 성을 지켜냅니다.
모르드개의 권면을 따른 에스더가 이제 민족의 당한 위기와 하만의 악함을 폭로했습니다.
가정의 복음화, 직장의 복음화, 뭇기관의 복음화, 민족의 복음화가 사뭇 필요한 이유입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죽으리라"하였더니 그 민족이 그 희생으로 살리라 된 것입니다.
롬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제 하만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7:6) 에스더가 가로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를 앞에서 두려워하거늘
육체의 정욕은 성결함 앞에서, 성령의 빛 비취임 앞에서 초라하게 떱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 영광 앞에서 인간의 의는 엎드러지곤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하나님의 영광, 모세가 본 하나님의 영광, 밧모섬에서 요한이 본 주님의 영광,
이 모든 공통됨은 두려워했고 엎드러짐입니다.
심지어 주님을 잡으려 왔던 군대와 하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18: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제 하만은 처단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모르드개를 달려고했던 그 나무장대에서,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처단했습니다.
소위 공의란 이름으로 3심 재판을 앞세우고, 민주주의란 미명으로 다수결의로써 바라바는 놓임을 당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태어났을 때 처치하지 못했던 그 원한을 갖고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하나님의 큰 권능으로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창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를 성취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인은 하나님께서 처리하심이 하나님의 계시된 공의입니다.
주의 죽으심은 나의 죄, 악 때문입니다.
주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나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 때문입니다.
7:9) ~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고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었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가로되 그 나무에 하만을 달라 하매
죄는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방편에 의해서,
하나님의 거룩은 죽음이란 진노에서 만족하게 성취되고, 하나님의 사랑은 부활로써, 비로써 성취된 것입니다.
7:10)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십자가는 하나님 공의와 사랑의 표입니다.
죄는 죽고 죄인은 살리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은 반전의 명수시고 원수의 허를 지르는 선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죽은 종교는 성지를 찾아도 산 신앙은 십자가의 주를 만납니다.
에스더는 이제 내친김에 더 나아가 모르드개와의 관계까지 왕에게 밝힙니다.
8:1) ~에스더가 모르드개는 자기에게 어떻게 관계됨을 왕께 고한고로 모르드개가 나아오니
죄가 처리되었으니 이제 성령이 다스림은 당연합니다.
영과 육의 두 성품의 갈등과 전쟁은 끝났고 성령이 다스림으로 평강과 성결함이 깃듦은 당연지사입니다.
8:3) 왕이 하만에게 거둔 반지를 빼어 모르드개에게 준지라 에스더가 모르드개로 하만의 집을 주관하게 한지라
7:4)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빛은 언제나 어두움을 폭로합니다.
그리고 빛은 하나님께 속한 만큼 하나님의 사용하시는 방편이 되어 구원의 은혜를 이룩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인 "죽으면 죽으리라" 하여, 죽었다고 간주할 때, 믿을때, 당당하며 거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두려운 원수는 언젠나 죽음인데, 그 죽음을 맞설 수 있는 족속이 누구인가요?
이미 죽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를 머리로 한 새 족속인 만큼 세상은 이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성도들이 이 모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그리스도인과는 얼마나 다른지요? 현대는 얼마나 비굴한지요? 그래서 죄에 잡혀 비참하게 사는 것 아닌지요?
직장인 예배를 수년동안 운영했습니다. 유명 직장의 신우회 인도와 또 교회당에서 수요예배를,,
대체로 당당한 그리스도인들이 참석했습니다만 그럼에도 자신의 직장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옳바르게 진술하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었기에, 믿노라하면서 쉬쉬하곤했습니다.
딱 두가지 이유였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순전하지 못하여 "하나님 영광을 가린다." 파가 있었고,
다른 파는, 회사내의 불이익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회사의 불이득보단 자신들의 불편이었습니다.
어디든 소수가 다수를 어거합니다.
세상도 소수의 의인이 멸망 받을 성을 지켜냅니다.
모르드개의 권면을 따른 에스더가 이제 민족의 당한 위기와 하만의 악함을 폭로했습니다.
가정의 복음화, 직장의 복음화, 뭇기관의 복음화, 민족의 복음화가 사뭇 필요한 이유입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죽으리라"하였더니 그 민족이 그 희생으로 살리라 된 것입니다.
롬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제 하만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7:6) 에스더가 가로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를 앞에서 두려워하거늘
육체의 정욕은 성결함 앞에서, 성령의 빛 비취임 앞에서 초라하게 떱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 영광 앞에서 인간의 의는 엎드러지곤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하나님의 영광, 모세가 본 하나님의 영광, 밧모섬에서 요한이 본 주님의 영광,
이 모든 공통됨은 두려워했고 엎드러짐입니다.
심지어 주님을 잡으려 왔던 군대와 하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18: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제 하만은 처단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모르드개를 달려고했던 그 나무장대에서,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처단했습니다.
소위 공의란 이름으로 3심 재판을 앞세우고, 민주주의란 미명으로 다수결의로써 바라바는 놓임을 당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태어났을 때 처치하지 못했던 그 원한을 갖고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하나님의 큰 권능으로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창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를 성취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인은 하나님께서 처리하심이 하나님의 계시된 공의입니다.
주의 죽으심은 나의 죄, 악 때문입니다.
주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나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 때문입니다.
7:9) ~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고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었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가로되 그 나무에 하만을 달라 하매
죄는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방편에 의해서,
하나님의 거룩은 죽음이란 진노에서 만족하게 성취되고, 하나님의 사랑은 부활로써, 비로써 성취된 것입니다.
7:10)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십자가는 하나님 공의와 사랑의 표입니다.
죄는 죽고 죄인은 살리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은 반전의 명수시고 원수의 허를 지르는 선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죽은 종교는 성지를 찾아도 산 신앙은 십자가의 주를 만납니다.
에스더는 이제 내친김에 더 나아가 모르드개와의 관계까지 왕에게 밝힙니다.
8:1) ~에스더가 모르드개는 자기에게 어떻게 관계됨을 왕께 고한고로 모르드개가 나아오니
죄가 처리되었으니 이제 성령이 다스림은 당연합니다.
영과 육의 두 성품의 갈등과 전쟁은 끝났고 성령이 다스림으로 평강과 성결함이 깃듦은 당연지사입니다.
8:3) 왕이 하만에게 거둔 반지를 빼어 모르드개에게 준지라 에스더가 모르드개로 하만의 집을 주관하게 한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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