뵈뢰아 사람들, 행17: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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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일행은 핍박으로 밤에 이동을 하곤 했습니다.
열심유대인들이 계속 방해의 추격전을 했기 때문입니다.
행17: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뵈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그럼에도 또 유대인들 곁에서 머물기도 합니다.
뵈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먼곳이 아닌듯 합니다.
건강한 성인 남자가 부지런히 걸으면 약40Km, 밤에 갔으니 이보단 가까운 고장인 듯 합니다.
이 뵈뢰아, 앞선 장에서 성경을 어떻게 풀어 말씀해야 하는가? 를 보았다면 뵈뢰아 사람들은 어떻게 말씀을
받아야하는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행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 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람이란 참 묘한 존재라서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마음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낳은 자식도, 곁에 있는 부부도, 자신도 몰라 헷갈려 하곤합니다.
보십시오. 데살로니가 사람들 보다 더 신사적이라니, 지역의 차이가 이렇게 나타납니다.
그러니 남방민족이 예술적이고 북방민족이 호방적인 것은 이상하질 않습니다.
기질이란 환경의 영향도 받아 유전자와 함께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곧잘 싸웁니다. 특히 영호남이 그렇습니다. 훗날 통일되어 함경도 국회의원이 있다면
맞설 수 없을 듯합니다.
작은 반도국가인 우리 나라만 봐도 말의 억양이 내륙과 바닷가가 다르지 않나요?
그렇다면 뵈뢰아 사람들의 신사적인 성향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기후도 지역도 경제도 사납지않고 뭐든
무난한 고장의 사람들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신사적인(open the mind), 신뢰가 갑니다. 이 신사적인 기질이 낯선 바울일행에게도 격식을 갖추었고 신뢰를 주었을 것입니다. 이 신사적임이,,
*말씀을 간절히 받았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 고플때에는 별별음식이 맛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는 이가 좀 부족해도 사모할때는 이유가 없습니다. 현대는 말씀의 과잉공급시대이기에
타박이 많습니다. 모 장로님은 명문대학 출신입니다. 그 학교 출심임을 긍지로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렇지못한 목사들은 자신보다 공부못했던 학생들로 여겨진답니다.
이해는 되지만 불행입니다. 여기에는 간절함이 없습니다. 설교하면 팔괴고 눈감은채 감상하기 일 수 입니다.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믿지말고 생각하라." 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무조건적인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에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아멘"소리가 믿음의 잣대가 되어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믿음은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될 때에 소리와 상관없이 인정받습니다. 구호나 함성보다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의구심을 갖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이 하셨다할 때의 아멘은 참 아멘이 됩니다. 그래서 아멘을 강요하면 곤란합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방금도 에스라서를 밑줄치고 읽었습니다만 상고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식사는 곱씻어야 맛도나고 소화에도 좋답니다.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과잉공급은 상고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설교는 설교자에게도, 성도에게도 너무 많아 피차에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목사에게는 주간에 1~2편이면 적당하고 성도에게도 적당합니다. 그렇지않으니 목사의 입이 힘들고 듣는 귀가
다른 별식을 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높인다는 것은 자주하고 자주 듣는 일이 아닙니다.
예배를 마쳤는데 설교했는데, 전도회에서 회의 전 또 설교를 하랍니다. 이 모습이 말씀중심인가요?
성구를 액자에 넣어 거는 일도 우리에겐 없습니다. 말씀은 '장식용'이 아니고 , 말씀은 순종용입니다.
듣고 순종할때에 그 말씀이 인정받고 권위가 세워지며 살아나는 것입니다.
행17: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뵈뢰아 사람들, 만나고 싶습니다. "믿는 사람이 많은 것" 이상일이 아닙니다.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당연지사 입니다. 오늘의 교회상에서 반추한다면 어떨까요? 부흥은 이런 모습을 지녔습니다.
유명 연예인이 있어 젊은이들이 모이고, 유력가가 출석하니 줄을 대고자하여 모이고 등이 아닙니다.
뵈뢰아에서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여러층의 믿는 일이 일어났기에 열매입니다.
뵈뢰아 사람들의 신사적임은 부흥과 신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열심유대인들이 계속 방해의 추격전을 했기 때문입니다.
행17: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뵈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그럼에도 또 유대인들 곁에서 머물기도 합니다.
뵈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먼곳이 아닌듯 합니다.
건강한 성인 남자가 부지런히 걸으면 약40Km, 밤에 갔으니 이보단 가까운 고장인 듯 합니다.
이 뵈뢰아, 앞선 장에서 성경을 어떻게 풀어 말씀해야 하는가? 를 보았다면 뵈뢰아 사람들은 어떻게 말씀을
받아야하는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행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 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람이란 참 묘한 존재라서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마음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낳은 자식도, 곁에 있는 부부도, 자신도 몰라 헷갈려 하곤합니다.
보십시오. 데살로니가 사람들 보다 더 신사적이라니, 지역의 차이가 이렇게 나타납니다.
그러니 남방민족이 예술적이고 북방민족이 호방적인 것은 이상하질 않습니다.
기질이란 환경의 영향도 받아 유전자와 함께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곧잘 싸웁니다. 특히 영호남이 그렇습니다. 훗날 통일되어 함경도 국회의원이 있다면
맞설 수 없을 듯합니다.
작은 반도국가인 우리 나라만 봐도 말의 억양이 내륙과 바닷가가 다르지 않나요?
그렇다면 뵈뢰아 사람들의 신사적인 성향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기후도 지역도 경제도 사납지않고 뭐든
무난한 고장의 사람들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신사적인(open the mind), 신뢰가 갑니다. 이 신사적인 기질이 낯선 바울일행에게도 격식을 갖추었고 신뢰를 주었을 것입니다. 이 신사적임이,,
*말씀을 간절히 받았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 고플때에는 별별음식이 맛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는 이가 좀 부족해도 사모할때는 이유가 없습니다. 현대는 말씀의 과잉공급시대이기에
타박이 많습니다. 모 장로님은 명문대학 출신입니다. 그 학교 출심임을 긍지로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렇지못한 목사들은 자신보다 공부못했던 학생들로 여겨진답니다.
이해는 되지만 불행입니다. 여기에는 간절함이 없습니다. 설교하면 팔괴고 눈감은채 감상하기 일 수 입니다.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믿지말고 생각하라." 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무조건적인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에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아멘"소리가 믿음의 잣대가 되어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믿음은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될 때에 소리와 상관없이 인정받습니다. 구호나 함성보다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의구심을 갖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이 하셨다할 때의 아멘은 참 아멘이 됩니다. 그래서 아멘을 강요하면 곤란합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방금도 에스라서를 밑줄치고 읽었습니다만 상고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식사는 곱씻어야 맛도나고 소화에도 좋답니다.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과잉공급은 상고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설교는 설교자에게도, 성도에게도 너무 많아 피차에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목사에게는 주간에 1~2편이면 적당하고 성도에게도 적당합니다. 그렇지않으니 목사의 입이 힘들고 듣는 귀가
다른 별식을 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높인다는 것은 자주하고 자주 듣는 일이 아닙니다.
예배를 마쳤는데 설교했는데, 전도회에서 회의 전 또 설교를 하랍니다. 이 모습이 말씀중심인가요?
성구를 액자에 넣어 거는 일도 우리에겐 없습니다. 말씀은 '장식용'이 아니고 , 말씀은 순종용입니다.
듣고 순종할때에 그 말씀이 인정받고 권위가 세워지며 살아나는 것입니다.
행17: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뵈뢰아 사람들, 만나고 싶습니다. "믿는 사람이 많은 것" 이상일이 아닙니다.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당연지사 입니다. 오늘의 교회상에서 반추한다면 어떨까요? 부흥은 이런 모습을 지녔습니다.
유명 연예인이 있어 젊은이들이 모이고, 유력가가 출석하니 줄을 대고자하여 모이고 등이 아닙니다.
뵈뢰아에서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여러층의 믿는 일이 일어났기에 열매입니다.
뵈뢰아 사람들의 신사적임은 부흥과 신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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