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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감동으로, 행21:1~16 > 나의간증

성령의 감동으로, 행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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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4-07-15 09:33 조회 2,40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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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일행은 밀레도에서 작별을 한 후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났습니다.
행21:1)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틑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참 힘든 여정입니다.
현대에서 비행기 타고 환승하며 대기하는 일은 피곤하기 그지없습니다만 바울일행은 선박, 그것도 범선을 이용했을 것을 생각하면 그 고생살이에 사뭇 숙연해 집니다.
행21:2~3)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개인적으론 선교여행에서 가장 힘든 곳이 미얀마였습니다. 수도 양곤에서 프로펠로 비행기로 2시간 날아 도착한 만델라이, 그곳에서 또 비포장 길을 4시간 달려 도착한 곳이었습니다.
차가 부실해 짐칸에서 쌀부대를 쓴체 이동해야했습니다. 먼지를 뒤집어써 산신령 같았습니다.
귀국해서는 모두가 몸살을 해야만 했습니다.
바울일행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보다 더했을 것입니다. 배는 작고, 진동은 심하고, 멀미에 탈진하고 등,

그런데 끊임없는, 일관적인 메세지가 있었는데 곧 성령의 지시하심입니다.
행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하더라
행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얼마나 확실한 메세지인지요?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얼마나 구하는 은혜인지요?
이쯤되면 성령께 민감한 바울은 예루살렘 입성을 재고해야 했는데 그렇지않았습니다.
불순종이기 쉽상입니다. 순교를 위한, 자기 목적을 위한 예루살렘 입성이 되는 듯합니다.

왜 성령은 일관된 메세지를 주시며 왜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갈까요?
성령과 바울과의 신뢰와 신의의 모습입니다.
성령은 바울에 대한 신의로써 안전을 경고하시고 바울은 주께 대한 신의로써 죽음도 불사한 것 아닐까요?
이 신의가 발휘되는데는 이미 신뢰가 형성되었기에 가능합니다.
성령은, 바울을 충성되게 여기시며 바울은 주께 은혜의 빚진 자였기 때문입니다.
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렇습니다. 위의 모습이 주를 향한 바울의 일편단심의 충성이라면
성령의 일관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메세지는, 주의 사랑이었습니다. 신의와 신뢰의 모습인 셈입니다.

사랑은 빛깔만 곱거나 말만 무성한게 아닙니다. 서로 아끼며 위하는 일입니다.
주와 바울은 밀착된, 허니문 같습니다.

만약, 반대적 현상의 일이 일어났다면 어떨까요? 예컨대 성령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한다"는 메세지와
"아무런 일도 없으리라는.." 안전의 메세지를 주셨음에도, 바울은 그럼에도 "난 못가겠습니다." 했다면,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미 무너진 관계이기에 아무런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만 그렇지않았기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된 줄 믿습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 이치가 여상히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내가 상전이라면 어떤 일꾼을 찾을까요? 내가 일꾼이라면 어떤 상전을 찾을까요?
중요한 공통점은, 나를 알아주는 이입니다. 성령은 바울을, 바울은 주를  그렇게 인정했습니다.
행21: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그쳤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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