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제일교회
홈로그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21:17~36 > 나의간증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21:17~36

페이지 정보

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4-07-15 11:17 조회 2,377회 댓글 0건

본문

바울일행이 다시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행21: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리고 곧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행21: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이제 예루살렘의 그 보고를 들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일행의 3차 선교가 마친 것입니다.
그러나 우려의 목소리도 들렸습니다.
행21: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바울은 믿노라하면서 율법에 열심있는 자들을 의식하여 교회지도자들의 권면을 따랐습니다.
행21:24)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일종의 타협안인데, 바울답지 않은 이 처신은 오히려 잡히는 문제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또 다른 마지막 선교는 이렇게 죄수의 몸으로 시작되는 셈입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는 대충 윤곽이 잡힙니다.
어찌 보면 일중독 걸린 사람 같습니다. 물론 그의 일은 선교였습니다만 잠시도 쉼이 없습니다.
빨갛게 녹슬기 보단 하얗게 재가 되길 선호하는 타입 같습니다.
그 피곤함을 갖고 예루살렘에 와서 곧 선교보고를 하고 또 유대인들의 반감에서 벗어나고자 서원한 자들을 데리고 성전으로 향했기 때문입니다.

말이 났지만 엘리야나 엘리사는 사회성이 부족한 종같습니다.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멜산이나 광야에서 머문일이 많았는데, 일종의 비사교적인 모습 아닌가요?
엘리야는 로뎀나무아래서 죽기를 구하였으니, 우울증세도 있었나 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떨까요? 일중독증 말고, 자존심이 쎈 종같습니다. 생활의 비참은 견디어도 일과 명예에 관한
자부심이 높았던 종이 아닐까요? 그래서 자신에 대한 오해와 폄하를 불식시키고자 했던 것이,
잡히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행21: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예루살렘의 분위기와 당시 예루살렘의 거주 유대인들의 신앙의 단면입니다.
믿노라하지만 여전히 율법주의 인것입니다. 뼛속까지 율법이 스며있습니다.
바울을, 형사범을 현장에서 체포하듯 성전에서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선동도 했습니다.
행21: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물론 성전에 들어간 것은 맞지만 헬라인은 아니었습니다. 오판한 것이었습니다.
행21:29)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그럼에도 소용없었습니다. 이미 반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온 성이 소동하여" 난리가 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주안에서 정숙한 종이고, 예민한 종이었을 듯 합니다. 선교지의 비참함은 견딜 수 있어도, 붙잡히는
비굴함은, 또한 자신을 늘 추격한 율법주의들은 큰 스트레스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주의 평강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생활이, 비참과 비굴이 함께 왔다면 어떨까요? 후회만 있었을까요? 낙심만 있었을까요? 일찍기 예고된 일이였기에 담담했을까요? 전자로 여겨집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며
변명하는, 이해시키는 노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행22:1)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여기서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바울답지 않게 처신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을 너무 의식했으며,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의 말을 너무 신뢰했습니다. 그들의 권면은 주의 말씀이나 지시가 아니었습니다.
행21:23)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이 말은, 교회지도자들이 기도 후가 아니라 탄식과 염려속에서 결정했던 말이었습니다.
행21:22)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물론 모든 일이 주의 뜻대로 된다지만 현장에서 갓돌아온 바울에게는 한갓 탁상공론이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지쳐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도 나오지만 바울의 구명을 위해서 교회지도자들은 애쓰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던 그 모습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다른 모습 아닌가요? 수만명이 있다지만 율법주의에 발목잡히는, 성령의 감동이나 지시보다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사람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절충이나 타협은 언제나 미봉책이 됩니다.
'우리'의 말은, 방법은, 스스로를 허물게 됩니다. 많이 속상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