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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회의, 행15:1~21 > 나의간증

예루살렘회의, 행1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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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4-06-30 09:55 조회 2,27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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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인 방법은 회의로 결정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회의는 참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훗날 회의 결과를 지키려는 책임과 의지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문이 기억됩니다.
미국이 연방제로 합의되었지만  그 연방제를 깨려는 정치인들을 향한, 본래 독립정신의 고취였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남미처럼 여러국가로 쪼개지지 않은 이유가 이 연설의 효과였고, 그들 선조의 정신을 잇고자했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일종의 신의인 셈입니다.

예루살렘 회의는 정치나 사회적인 문제를 위한 회의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회의를 위한 회의도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보고를 듣고 격려하는 자리에서,행15: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이방인이 회개한 일과 그 후의 윤리를 다루어 귀감을 삼고자했던 일입니다.
행15:1~2)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 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이방인들에 대한, 모세의 율법이냐? 믿고 세례냐? 의 정의을 얻는 매우 신중한 일이였습니다.
전래가 없던 일이기도 했습니다.
행15:6~7)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그 결과는 간단했습니다.베드로의 진술대로 행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행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얻는 줄을 믿노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행15:19~20)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라는 것이 가하니

난제일수 있을텐데 한마디로 결과는 쉽게 나왔고 그 결과는 그들이 전한 복음과 찾아오신 성령의 뜻과도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모습입니다. 오늘날도 믿음의 귀감되는 모습입니다.
유감되게 우리에게는 이론적으론 그런데 정치적으론 그렇지 못합니다.
이게 모순입니다. 나는 쉬운 길을 찾으면서 남은 그 길을 가지 못하게 합니다.
또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하면서 복음을 가리우는 막을 치며, 자신만 진리인냥 강조하곤 합니다.
그러나 보니 성총회도 갈등과 정치의 이해득실로 몸살을 앓고 이파저파로 갈리워졌습니다.
주를 위한다고하며, 선교중심적인 목적인 교단도 결국 자기이해 득실에 따라 죽이고 사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모 장로교단은 자칭 장자교단이랍니다. 그 신대원은 외국의 유학생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총회는 그들에게 목사안수를 하지않습니다. 강도사자격 고시도 못치르게 합니다.
그 총회선교부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자신들의 교단 선교사만 지원합니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국적이 다른 선교사는 총회 회원인데도 어림없습니다.
즉 조선족의 경우 신대원의 유학은 받는데 강도사 고시와 목사안수는 않되고 설령 노회에서 목사로 세웠다할지라도 총회회원이며 해당 노회의 선교사인데도 선교부지원은 않됩니다. 매우 편파적인 모습입니다.
더 우스운 일은 어느 누구도 이 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보수가 폐쇄가 된 경우 입니다.

그렇다면 그 옛날, 예루살렘 회의는 얼마나 개방적이었던지요? 사도들 역시 선교에 합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이 도량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성령의 사람이냐? 정치의 사람이냐? 아니겠나요?
성령은 차별을 초월합니다만 정치는 구별시킵니다.
성령은 사람을 구원하는 목적으로 활동하시지만 사람은 자신 중심으로, 내 교단, 내 나라, 내 교회를 맴돌게
합니다.
행14: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희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우리는 알멩이 보다 포장따라 판단합니다.
커피 보다 커피잔이나 카페의 분위기를 먼저 판단하기도 합니다. 본질을 놓치고 있습니다.
교단이나 총회의 존재가 무엇인가요? 그 회의는 큰주제는 무엇인가요? 무엇이어야 할까요?
시골교회 목사나 오지의 선교사들이 영접받으며 순서도 맡고 격려받는 일은 언제나 생길까요?
왜 우리들은 그처럼 치열하게 싸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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