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행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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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능력은 성품의 개선이나 삶의 개량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재탄생이고 창조입니다.
주안에서 죽었다가 완전히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능력입니다.
개인마다 이 경험과 정도가 다릅니다.
사울에겐 강력하고 특별났습니다.
유대교의 열심당원으로 살기가 등등할 때에,
다메섹을 가는 도중에,
둘러 비취는 빛과 땅에 엎드러짐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도 들었습니다.
일행도 있었지만 일행들에겐 벼락치는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준비된 아나니아에게 보냄을 받고 안수받음으로 회복이 일어났지만, 눈에 비늘 같은 것도 벗겨졌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죽었다던 예수를 생활속에서 사건적으로 만남을 이룩했습니다.
기독교는 "전에는 ~이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다."는
자기증명의 고백이 필히 나옵니다.
사울의 경우, 전에는 핍박자이었으나 지금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후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빛, 음성,그리고 세례, 전도
그의 일련의 과정입니다.
누구든 비슷합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죄인됨과 구세주를 앎), 음성(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고백하며 영접함),
세례(불세례가 먼저 올 수 있지만 물세례에 참여)
할렐루야 교회의 김 상복 목사님은 평양 산정현교회 출신입니다.
소시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새벽기도회를 나갔고 청년때도 집사로서 찬양대 지휘자로 섬겼답니다.
어느 주일, 성찬식때 거듭남을 경험하여 지금까지 목사로 목회와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 날, 목사님이 떡을 분배하시면서 "찬양대부터,," 하시는데 자신은 그 떡을 받을 자격이 없었음을
인식했답니다.
사양하자니 성도들의 수군거림이 걱정되어 망설이는데, 속에서 "네 죄를 위하여 내가 죽었다."는 음성을 듣고
믿음이 와서 그 떡을 받아먹고 기절했답니다.
그 전에는 좋은 교회청년이요. 열심있는 찬양대장이었다가 성찬과 함께 주의 대속에 참예한게 된 것입니다.
회심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경험보다 하나님지식, 곧 신지식입니다.
아프리카사람들은 하나님을 흑인화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흑인일까요?
유럽사람들은 예수님을 백인화 했습니다.
동양인이 우리는 어떨까요? 하나님을 산신령화하기 쉽상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이나 주는 어떨까요? 옳바른 신지식의 기초요. 기본입니다.
운보 김 기창화백은 일찍이 한국적 예수님과 생애를 화폭에 옮겼습니다.
작품성을 떠나서 한국적임이 참좋았습니다.
사울은 음성이 들리자 "주여 뉘시오니까?" 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누굴 떠올리겠나요? 귀신인가? 무슨 난리여? 그런데 그는 "주여,"를 그 상황에서 처음
외쳤습니다.
영광의 조상들과 하나님을 제사하고 어릴적 부터 율법을 배우고 율례적으로 산 이유입니다.
이 덕에 단순히 종교심이나 종교성이 아닌 축적된 하나님지식이 바르게, 성령에 의해서 믿음화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왜 조기 신앙교육을 시켜야 하는가? 답이 있습니다.
왜 성령을 사모해야 하는가? 답이 됩니다.
우상의 지식과 어릴때 학교나 교회에서 들은 하나님 지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결과를 이룹니다.
차라리 백지 같은 무지가 낫기도 할 성 싶어도 역시 어렵습니다.
탈북자들에게 성경공부를 지도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혼란스러워했습니다. "목사님, 조선의 주체사상과 같아 혼란스럽구만요."
하나님 아버지(김일성 아버지), 기도와 찬양(김일성 우상화), 성경공부(주체사상학습), 회개(자아비판)로 연상되었답니다. 참 힘들었고 가시적 성과는 없었습니다.
잘못된 신지식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필리핀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들의 차범퍼에 "I Love Jesus"했어도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집에는 불상도 있고 마리아 상도 있어 같은 기도의 대상입니다.
인도, 인도네시아 ,네팔, 아니 모든 이방신을 섬긴 국가들이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의 회심을 사울에게 이루셨음은 그의 신지식을 옳게 잡고자하심으로 여겨집니다.
이 모습은 또한 롤모델이기도 할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이런 성령의 활동이 일어나야 잘못된 신지식이 깨지고 성경적 하나님과 주가 모셔질 것입니다.
사울은, "주여" 했습니다.
물에 빠진 승려가 만약에 "주여"했다면 어떤가요?
그에게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임했다는 증거 아닐까요?
"랍비여" 는 보편적인 호칭이지만 "주여"는 신앙적 호칭입니다.
우리의 꿈속에서도 이 부름이 있다면,
주안에서 죽었다가 완전히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능력입니다.
개인마다 이 경험과 정도가 다릅니다.
사울에겐 강력하고 특별났습니다.
유대교의 열심당원으로 살기가 등등할 때에,
다메섹을 가는 도중에,
둘러 비취는 빛과 땅에 엎드러짐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도 들었습니다.
일행도 있었지만 일행들에겐 벼락치는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준비된 아나니아에게 보냄을 받고 안수받음으로 회복이 일어났지만, 눈에 비늘 같은 것도 벗겨졌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죽었다던 예수를 생활속에서 사건적으로 만남을 이룩했습니다.
기독교는 "전에는 ~이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다."는
자기증명의 고백이 필히 나옵니다.
사울의 경우, 전에는 핍박자이었으나 지금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후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빛, 음성,그리고 세례, 전도
그의 일련의 과정입니다.
누구든 비슷합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죄인됨과 구세주를 앎), 음성(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고백하며 영접함),
세례(불세례가 먼저 올 수 있지만 물세례에 참여)
할렐루야 교회의 김 상복 목사님은 평양 산정현교회 출신입니다.
소시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새벽기도회를 나갔고 청년때도 집사로서 찬양대 지휘자로 섬겼답니다.
어느 주일, 성찬식때 거듭남을 경험하여 지금까지 목사로 목회와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 날, 목사님이 떡을 분배하시면서 "찬양대부터,," 하시는데 자신은 그 떡을 받을 자격이 없었음을
인식했답니다.
사양하자니 성도들의 수군거림이 걱정되어 망설이는데, 속에서 "네 죄를 위하여 내가 죽었다."는 음성을 듣고
믿음이 와서 그 떡을 받아먹고 기절했답니다.
그 전에는 좋은 교회청년이요. 열심있는 찬양대장이었다가 성찬과 함께 주의 대속에 참예한게 된 것입니다.
회심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경험보다 하나님지식, 곧 신지식입니다.
아프리카사람들은 하나님을 흑인화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흑인일까요?
유럽사람들은 예수님을 백인화 했습니다.
동양인이 우리는 어떨까요? 하나님을 산신령화하기 쉽상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이나 주는 어떨까요? 옳바른 신지식의 기초요. 기본입니다.
운보 김 기창화백은 일찍이 한국적 예수님과 생애를 화폭에 옮겼습니다.
작품성을 떠나서 한국적임이 참좋았습니다.
사울은 음성이 들리자 "주여 뉘시오니까?" 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누굴 떠올리겠나요? 귀신인가? 무슨 난리여? 그런데 그는 "주여,"를 그 상황에서 처음
외쳤습니다.
영광의 조상들과 하나님을 제사하고 어릴적 부터 율법을 배우고 율례적으로 산 이유입니다.
이 덕에 단순히 종교심이나 종교성이 아닌 축적된 하나님지식이 바르게, 성령에 의해서 믿음화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왜 조기 신앙교육을 시켜야 하는가? 답이 있습니다.
왜 성령을 사모해야 하는가? 답이 됩니다.
우상의 지식과 어릴때 학교나 교회에서 들은 하나님 지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결과를 이룹니다.
차라리 백지 같은 무지가 낫기도 할 성 싶어도 역시 어렵습니다.
탈북자들에게 성경공부를 지도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혼란스러워했습니다. "목사님, 조선의 주체사상과 같아 혼란스럽구만요."
하나님 아버지(김일성 아버지), 기도와 찬양(김일성 우상화), 성경공부(주체사상학습), 회개(자아비판)로 연상되었답니다. 참 힘들었고 가시적 성과는 없었습니다.
잘못된 신지식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필리핀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들의 차범퍼에 "I Love Jesus"했어도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집에는 불상도 있고 마리아 상도 있어 같은 기도의 대상입니다.
인도, 인도네시아 ,네팔, 아니 모든 이방신을 섬긴 국가들이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의 회심을 사울에게 이루셨음은 그의 신지식을 옳게 잡고자하심으로 여겨집니다.
이 모습은 또한 롤모델이기도 할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이런 성령의 활동이 일어나야 잘못된 신지식이 깨지고 성경적 하나님과 주가 모셔질 것입니다.
사울은, "주여" 했습니다.
물에 빠진 승려가 만약에 "주여"했다면 어떤가요?
그에게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임했다는 증거 아닐까요?
"랍비여" 는 보편적인 호칭이지만 "주여"는 신앙적 호칭입니다.
우리의 꿈속에서도 이 부름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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