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찌해야 하나요?, 행2:37~42
페이지 정보
본문
베드로의 설교는, 아니 성령께서 베드로의 입술을 통한 설교는 제자들이 술취했다고 조롱했던 저들에게
찔림이 되어 "제자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는 탄식에 이르게 했고
주 영접으로 까지 이르게했습니다.
38절)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41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당시 예루살렘의 상주 인구는 3만 남짓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10분의 1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당대에도 난리요 특종이었을 것입니다.
성령이 활동하시는 데에는, 때에는 이와 같은 일이 있습니다.
그냥 기적이요 난리요 사건이 아니라 주가 선포되고 주를 믿는, 그래서 회개가 따르는 변화와 변혁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전개하는 회개운동, 영성운동, 기도운동, 각종 도덕운동과는 근본이 다릅니다.
우리들이 모방할때 어떤가요? 주제와 재정과 장소와 강사와 청중동원을 염려하곤 합니다.
요란하지만 회개는 없습니다.
군세례의 경우 3000~500명을 세례주었다고 나팔불지만 기만입니다.
그들은 세례 후의 특식을 기대했을 뿐입니다.
그 많은 세례장병들은 제대 후에 어디있나요?
우리는 열이 있으면 빛이 없고 빛을 만들면 열이 없습니다.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보혜사로 오셨고 교회의 힘이 되십니다.
성자 주님께도 성령의 덧입히심이 있었습니다.
마3: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무당도 자신들의 신을 받아야 용하다는 소문을 얻습니다.
사람잡는 선무당은 신받지 못한 짝퉁 아닌가요? 하물며, 주의 종에게는 확실해야 합니다.
현대에서는 온갖 과학과 유혹과 마귀의 궤계가 있기에 성령의 전신갑주는 필수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외면당하고 있으니 허약한 교회가 되고 손사레질 받는 복음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임함은 가시적입니다.
본인이 알고 타인이 압니다. 위에 본문에도 주님은 자기 위에 성령임하심을 보셨습니다.
오늘날 신학교는 대학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종합대학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신학은 있는지 모르지만 성경과 복음과 성령세례는 모릅니다.
옛날에는 성경학교에서 부터 배웠습니다. 신학교에서 신앙을 배웠습니다.
성령세례는 기본이었습니다. 기도는 일상이었습니다.
격세지감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세에 내가 너희에게서 믿음을 보겠으냐?"하셨는데 이마져 성취되고 있습니다.
심리학,마케팅,엔터테인먼트에 깊이 빠졌습니다.
베드로는 제자이지 신학교수가 아닙니다. 웅변가도 아닙니다. 설교는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한 곳은 광장이나 큰거리 어귀였을 것입니다.
음향도 없고 찬양대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인이 태반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큰소리로 외쳤지만, 들렸습니다. 가슴까지 메아리쳤고 죽은 영혼들을 뒤흔들었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신 성령이 저들로 하여금 듣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양방향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골 목사님에게 순회목사라면서 찾아와 "성령님은 이번주일에 여기서 설교하라셨습니다."
했습니다. 그러나 시골 목사님은 "그래요? 그렇다면 성령님은 왜 내게 아무런 말씀을 않하셨을까요?"
하며 거절했답니다.
그동안 주의 종이라 칭하는 많은 이들이 성령 운운했지만, 자빠지고 머리아픔과 헌금강요는 있었어도
진정한 회개는 없었습니다.
듣는 이와 이 시대가 강팍한 연고도 있겠지만, 성찰해야 합니다.
호랑이는 호랑이 새끼를 낳아 키웁니다.
보십시오. 회개했던 그들이 어땠나요? 즉시 변화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42절)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오늘날 이 모습 있나요?
친교와 사교성으로써 사람을 채우려고 하는데와 얼마나 다른지요?
찔림이 되어 "제자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는 탄식에 이르게 했고
주 영접으로 까지 이르게했습니다.
38절)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41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당시 예루살렘의 상주 인구는 3만 남짓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10분의 1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당대에도 난리요 특종이었을 것입니다.
성령이 활동하시는 데에는, 때에는 이와 같은 일이 있습니다.
그냥 기적이요 난리요 사건이 아니라 주가 선포되고 주를 믿는, 그래서 회개가 따르는 변화와 변혁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전개하는 회개운동, 영성운동, 기도운동, 각종 도덕운동과는 근본이 다릅니다.
우리들이 모방할때 어떤가요? 주제와 재정과 장소와 강사와 청중동원을 염려하곤 합니다.
요란하지만 회개는 없습니다.
군세례의 경우 3000~500명을 세례주었다고 나팔불지만 기만입니다.
그들은 세례 후의 특식을 기대했을 뿐입니다.
그 많은 세례장병들은 제대 후에 어디있나요?
우리는 열이 있으면 빛이 없고 빛을 만들면 열이 없습니다.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보혜사로 오셨고 교회의 힘이 되십니다.
성자 주님께도 성령의 덧입히심이 있었습니다.
마3: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무당도 자신들의 신을 받아야 용하다는 소문을 얻습니다.
사람잡는 선무당은 신받지 못한 짝퉁 아닌가요? 하물며, 주의 종에게는 확실해야 합니다.
현대에서는 온갖 과학과 유혹과 마귀의 궤계가 있기에 성령의 전신갑주는 필수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외면당하고 있으니 허약한 교회가 되고 손사레질 받는 복음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임함은 가시적입니다.
본인이 알고 타인이 압니다. 위에 본문에도 주님은 자기 위에 성령임하심을 보셨습니다.
오늘날 신학교는 대학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종합대학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신학은 있는지 모르지만 성경과 복음과 성령세례는 모릅니다.
옛날에는 성경학교에서 부터 배웠습니다. 신학교에서 신앙을 배웠습니다.
성령세례는 기본이었습니다. 기도는 일상이었습니다.
격세지감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세에 내가 너희에게서 믿음을 보겠으냐?"하셨는데 이마져 성취되고 있습니다.
심리학,마케팅,엔터테인먼트에 깊이 빠졌습니다.
베드로는 제자이지 신학교수가 아닙니다. 웅변가도 아닙니다. 설교는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한 곳은 광장이나 큰거리 어귀였을 것입니다.
음향도 없고 찬양대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인이 태반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큰소리로 외쳤지만, 들렸습니다. 가슴까지 메아리쳤고 죽은 영혼들을 뒤흔들었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신 성령이 저들로 하여금 듣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양방향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골 목사님에게 순회목사라면서 찾아와 "성령님은 이번주일에 여기서 설교하라셨습니다."
했습니다. 그러나 시골 목사님은 "그래요? 그렇다면 성령님은 왜 내게 아무런 말씀을 않하셨을까요?"
하며 거절했답니다.
그동안 주의 종이라 칭하는 많은 이들이 성령 운운했지만, 자빠지고 머리아픔과 헌금강요는 있었어도
진정한 회개는 없었습니다.
듣는 이와 이 시대가 강팍한 연고도 있겠지만, 성찰해야 합니다.
호랑이는 호랑이 새끼를 낳아 키웁니다.
보십시오. 회개했던 그들이 어땠나요? 즉시 변화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42절)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오늘날 이 모습 있나요?
친교와 사교성으로써 사람을 채우려고 하는데와 얼마나 다른지요?
- 이전글날마다 더하는 은혜, 행2:43~47 14.06.15
- 다음글조롱받는 이들, 행2:5~13 14.06.1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