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걸으라, 행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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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시는 일들은 주로 사도들이 구성원이었습니다.
제법 오래된 일입니다.
시내의 유명한 한 대형교회의 주일 예배후에,
그 정문에는 앉은뱅이 걸인이 구걸을 하고있었습니다.
나름 대목이다싶어 목좋은 곳에 자리를 펼쳤을 것입니다만
많은 성도들이 예배를 마치고 귀가하면서 어느 누구도 이 걸인에게 관심을 갖지않았습니다.
참 이상하다싶어 한 교인에게 물었더니 "오래된 걸인이다."는 모호한 답을 들었습니다.
7절)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9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런데 오늘 본문은, 같은 상황인데도 전혀 다른 반응과 상황이 나타났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시대요, 지역이요,인물입니다.
서울은 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였다면 본문은 기도하러 들어갈 때였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4절)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하니
그 걸인을 주목하여 본 마음의 눈이었습니다.
사실적으로 걸인으로 볼 수 있고, 진실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로 볼 수 있고
철학적으로 우주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저들은 구원얻을, 하나님이 찾으시는 어린양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으로 본 것입니다.
저들은 걸인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실제 저들이 지닌 전체적인 것을 준 셈입니다.
6절)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8절)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리고 그 결과는 또 다른, 유익한 파장을 낳았습니다.
10절)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니라
사람에 대한 관심,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안목, 주님의 안목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내가 주목받아야만 하는 신앙은 배금주의에 물든 신앙입니다.
또 다른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과 주님의 안목을 성취하는 신앙은 복음적 신앙입니다.
주님이 동행하심은 당연지사입니다.
두 사도들을 보십시오.
기도하러 성전을 찾았습니다. 저들에게 기도는 취미가 아니라 삶이였습니다.
걸인일지라도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주목하고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또한 저들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었습니다.
은과 금이 통용되는 시대였지만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기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믿음의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관심도 없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과 금만 구하는 신앙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사람은 두가지 필요가 있습니다. 항시 필요와 영구 필요입니다.
이 분별은 지혜입니다. 성령의 선물입니다.
걸인은 무지했기에 이 지혜가 없어 항시 필요를 원했지만 사도들은 지혜자이기에 영구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과거의 사도들도 이랬을 것입니다.
유감되게 은과 금은 붙잡고 예수그리스도는 놓치고 있습니다.
걸인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앉은뱅이의 구슬픔도 마음에 없습니다.
손을 내밀지도 못하고 "일어나 걸으라" 할 줄도 모릅니다.
오직 "부자되게 하소서" 만 간절한 듯 합니다.
"돈있어야 교회도 사업한다."는 변명을 하고
"돈없어서 예수를 못믿는다."는 구실을 주고 있습니다.
전도지는 더 튼튼해서 방수지로 만들고 휴지랑 사탕도 얹어줍니다.
"교회당에 한번만 찾아 주십시오." 사정을 합니다.
복음은 싸구려가 되고 하나님의 위엄은,, 그 위엄은 보이질 않습니다.
7절)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9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제법 오래된 일입니다.
시내의 유명한 한 대형교회의 주일 예배후에,
그 정문에는 앉은뱅이 걸인이 구걸을 하고있었습니다.
나름 대목이다싶어 목좋은 곳에 자리를 펼쳤을 것입니다만
많은 성도들이 예배를 마치고 귀가하면서 어느 누구도 이 걸인에게 관심을 갖지않았습니다.
참 이상하다싶어 한 교인에게 물었더니 "오래된 걸인이다."는 모호한 답을 들었습니다.
7절)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9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런데 오늘 본문은, 같은 상황인데도 전혀 다른 반응과 상황이 나타났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시대요, 지역이요,인물입니다.
서울은 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였다면 본문은 기도하러 들어갈 때였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4절)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하니
그 걸인을 주목하여 본 마음의 눈이었습니다.
사실적으로 걸인으로 볼 수 있고, 진실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로 볼 수 있고
철학적으로 우주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저들은 구원얻을, 하나님이 찾으시는 어린양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으로 본 것입니다.
저들은 걸인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실제 저들이 지닌 전체적인 것을 준 셈입니다.
6절)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8절)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리고 그 결과는 또 다른, 유익한 파장을 낳았습니다.
10절)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니라
사람에 대한 관심,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안목, 주님의 안목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내가 주목받아야만 하는 신앙은 배금주의에 물든 신앙입니다.
또 다른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과 주님의 안목을 성취하는 신앙은 복음적 신앙입니다.
주님이 동행하심은 당연지사입니다.
두 사도들을 보십시오.
기도하러 성전을 찾았습니다. 저들에게 기도는 취미가 아니라 삶이였습니다.
걸인일지라도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주목하고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또한 저들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었습니다.
은과 금이 통용되는 시대였지만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기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믿음의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관심도 없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과 금만 구하는 신앙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사람은 두가지 필요가 있습니다. 항시 필요와 영구 필요입니다.
이 분별은 지혜입니다. 성령의 선물입니다.
걸인은 무지했기에 이 지혜가 없어 항시 필요를 원했지만 사도들은 지혜자이기에 영구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과거의 사도들도 이랬을 것입니다.
유감되게 은과 금은 붙잡고 예수그리스도는 놓치고 있습니다.
걸인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앉은뱅이의 구슬픔도 마음에 없습니다.
손을 내밀지도 못하고 "일어나 걸으라" 할 줄도 모릅니다.
오직 "부자되게 하소서" 만 간절한 듯 합니다.
"돈있어야 교회도 사업한다."는 변명을 하고
"돈없어서 예수를 못믿는다."는 구실을 주고 있습니다.
전도지는 더 튼튼해서 방수지로 만들고 휴지랑 사탕도 얹어줍니다.
"교회당에 한번만 찾아 주십시오." 사정을 합니다.
복음은 싸구려가 되고 하나님의 위엄은,, 그 위엄은 보이질 않습니다.
7절)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9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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