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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주기도문 강해-4) > 나의간증

일용할 양식(주기도문 강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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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09-09-07 00:05 조회 3,24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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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5. 10
마6:9~13


일용할 양식

희망을 주는 거래「공정무역」을 들어보셨습니까?
가난한 국가의 생산품을 수입판매하여 가난한 국가를 돕는 거래행위입니다.
전 세계 무역양의 1% 수준이지만 계속 증가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YMCA, 두레생협, 아름다운가게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인류의 큰 문제
인류에게는 큰 문제가 하나 따릅니다. 곧「빵」즉「식량」의 문제입니다.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하며 저 칼로리나 유기농식을 찾는다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먹을까 하며 고심합니다.
세계 인구를 대륙별로 구별하면 아시아인 59% ,유럽인 15%,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인 9%
아프리카인 11%, 미국과 캐나다인 6% 그리고 여자가 52%,남자가 48% ,백인 30%
나머지 70% 기독교인 30% 다른종교 70%
30%는 글을 읽을 줄 알고 70% 문맹자입니다.
만약 글을 읽고 예수 신앙을 갖고 있다면 20%에 속한 부자입니다.
철근콘크리트 집과 화장실까지 냉,온수가 나오고 냉장고에 물건이 쌓이고 자동차, 전화, 컴퓨터가 있다면
최고의 사치를 누리는 부자에 속한 인류인데 바로 이런 부류에게「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주님의 '가르치신 기도'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혹자는 이 기도를 영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의 만나이기에
불신자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선교의 비젼'이라고 하지만 꼭 그럴까요?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선교는 빵이 함께 가야지 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곳에는 공허하게 들릴 뿐입니다.
분명한것은 인류의 문제는 동서고금을 통한 빵의 문제입니다.
이 인류의 큰 문제가 하나님에게도 큰 문제가 되기에 주님이「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하며
구하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2)하나님의 뜻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자명합니다. 큰 성전과 호사스런 장식속에 예배를 드리는 일보단
굶주린 인류나 이웃에게 양식을 주는 일이 우선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에게는, 허락된 풍요만큼 책임이 주어집니다.
눅12:48)무릇 많은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것이요

무슨 얘기입니까?
우리에게 주신 물질이니 건강이나 행복의 이유는 우리 이웃에게 나누고 돌보는데 사용하길 바라시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있는 사람이「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며 기도한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굶주린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약속인 셈입니다.

반면 우리에게 허락된 풍요를 흥청망청 써서 이기적이거나 탐욕을 위한 소비로 낭비한다면
훗날 그 책임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허락된 풍요에 죄책감을 갖거나 세상의 불평등을 탄식하거나 불편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우리보다 더 풍요로운 사람이 가난한 이웃에게 더 많이 나눠주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부금을 선뜻냈다고 하여 우리의 책임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아주 작은 여유를 받았다면 그 순간부터 그렇치못한 이웃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 보아야하고
할 수만 있으면 실천적이어야합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한 사건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할 때
주님은「너희가 먹을것을 주라」하셨습니다. 깜짝 놀란 제자들은「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까?」했습니다.
제자들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도 전적으로 동정하지 않는 이유를 이런 식으로 변명하고 있습니다.
이 변명이 무엇입니까?

①주님! 이들의 양식 준비는 이들의 몫입니다. 이들이 집나올때 당연히 먹을것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무책임한 행동까지 감싸주려는 것입니까?

②주님. 너무 순진하십니다.
저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게으른 행동을 나무라지 않고 감싸주시려는 것입니까?

③주님, 오늘은 저희가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지만 내일은 다시 굶게 될것입니다.
핑계없는 무덤 없듯이 가난한 이웃을 동정하지 않는 이유도 당당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십시오 이러한 제자들의 불평에는 아랑곳하시지 않고「너희에게 떡이 몇개나 있느냐?」하시면서
그 오병이어를 갖고 축사하시고「나눠주어라」명령하시므로 기적을 이루어 내신것입니다.
흔히 오병이어의 기적이요 티베랴 바닷가의 기적이라고 하지만 단순 예수님에 의한 초 자연적인 기적 이전에
예수님께서 작은것까지 기꺼이 나누고자 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한 무리들이 자신만을 위한 몫으로
숨겨둔 떡과 생선을 꺼내 나누어 먹은 기적일 수도 있습니다.

3)교회의 기적
이 티베랴의 기적은 현대 교회의 기적이기도 해야 합니다
만약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누리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실천한다면 어떤것일까요?

모든 성도와 교회가 모아둔 펀드를 해약해서 굶주리고 치료받지 못하고 헐 벗은 이웃에게
나누어 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기도만 하는 곳에는 기적도 부흥도 없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환자가 그렇습니다. 낫기를 바라고 있지만
아무도 그 못에 자신을 넣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자리를 들고가라」의지촉구 아닙니까.

기적은 만들고 부흥은 이루는 것입니다. 만약 이 땅의 교회들이 웅장한 성전과 수양원을 짓는 대신 그 돈으로
세상을 섬겼다면 세상사람들의 반응이 어떨까요?

기독교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의 기적과 부흥의 주된 이유는 기도만은 아니었습니다.
공격적인 전도와 웅장한 성전건축만도 아니었습니다.
근본적 이유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라"는 주님의 말씀에 충실히 순종한 까닭 이었습니다.

인구 5%만이 풍요를 누리고 나머지는 노예이거나 가난한 사람들 투성이었던 초대 교회 시절에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헐벗은 이웃에게 옷을 주고 병든 사람을 돌보아주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보는 성도들의 헌신적인 신앙이 문자 그대로 기적을 이루고 부흥을 만든것입니다.

행 4:34~35) 그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있는 자는 팔아
그 판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그러나 유감되게 초대성도들의「연민과 사랑」은 그만 전설이 되었습니다.
「예수 없는 기독교」가 된 것입니다.
슬프지요

어떤 동기에 의해 몇몇 교회등을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는 교회들이었습니다. 너무나 사회성이 빈약했습니다.

흔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성공 할 수 있다.' 라고 합니다.
불평등의 기원을 설명할 때 곧 잘 인용되는 속담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 만은 않습니다.
자원의 부족이 있고
제도의 편향이 있고
기득권자의 탐욕이 있습니다.

로버트 매카피 브라운이라는 학자는'예기치 않은 소식'이란 저서에서
"제3세계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투쟁에 가담해서
그들의 편을 들어주시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또한 "독재자의 편을 드시는 하나님이라면 사악한 하나님이요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하나님이라면 무관심인 하나님"이고
덧 붙이기를,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는 하나님만이 정의로운 하나님 일 것이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 밀어 붙인다고 해서 굶주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①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마음을 열어야 되고

②희생이 필요합니다.
내 식사량을 줄이고 내 사치를 줄이므로 그 몫이 가난한 이들에게 갈것입니다.

저금통을 모아 빈민국에 보낸적이 있었습니다. 교육장이신 집사님도 관내의 여러학교들을 참여시켰고
아직도 그 일에 매진하고 계십니다
기적입니다.
더 큰 기적을 만들어야 합니다.
굶주린 이웃이 없길,
모두가 맑은 물을 마시기를,
모두가 하늘을 가진 집에서 살며,
의료혜택을 받는 일,

결론)초 자연적인 기적만 기다리지 마십시오.
우리가「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의 참 말을 받아 들일때 이 기적은 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굶어죽은 이들이 있는데 매일 성경, 매일 기도는 무슨의미가 있으며
웅장한 건물과 예산은 어디에 의미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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