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자들,행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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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테반의 죽음은 사도들외에는 지방으로 다 흩어지는 강제성을 갖고 왔습니다.
고맙고 놀랍게도 피난 길의 그들은 자기네 살 걱정보다 순회전도자로 활동했습니다.
성령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빌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복음을 위한, 복음이 우선된, 복음이 영광되는 생활입니다.
현대의 성도들이 꼭 회복해야할, 성령으로 말미암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편견이 있었습니다.
행11:19)~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이들의 편견은 잘못이 아닙니다.
우주관과 역사관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우주관은 어땠을까요? 그 시대의 땅끝은 어디였을까요? 자신들이 살던 동네밖이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많이 출가한 것입니다.
섬출신 모목사님은 우리나라의 땅끝 섬을 세상끝으로 여겨 그 섬을 찾아 7년간 목회하였다가, 눈이 밝아져 부천에서 개척을 하던 중 중국도 보게 되어 나를 방문했습니다.
연길의 조선족 목사님께는 땅끝이 북한이랍니다.
이게 억지가 아니고 마음대로 되질 않습니다. 우주와 역사관과 밀접합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사관은 학교교육에서 형성되곤하는데 무신론적이고 진화론적 바탕의 사관입니다.
이 교육과 성경적 교육관의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까운 국가는 일본입니다. 지난 식민지국가 백성으로서 앙금이 남아있습니다.
미국사람이라고 부른데 비해 일본 놈이라하며 쪽바리라고 비하합니다. 모든 스포츠경기에선 꼭 이겨야만 됩니다. 그러다보니 선교사가 적습니다. 우상이 가장 심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공산국가하면 북한이 우선 떠오릅니다.
6,25때 받은 상처들이 남아있던 70년대까지는 반공과 방첩이 국시였기에 선교는 생각도 않했습니다.
당연한 편견입니다.
유대주의에 충만했던, 흩어진 성도들이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은 바로 이런 편견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용기있고, 반칙도 한 몇몇사람들 탓에 헬라인들에게도 복음 증거가 일어났습니다.
행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이 일은 성령의 뜻과도 부합되어
행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더라
우리의 편견이 얼마나 모순이던지요?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지요?
우리는 이 모습에서 새로운 시각의 필요를 깨닫습니다.
그 시각의 주체는 나, 우리가 아닌 성령이어야 합니다.
더 공부하고, 더 시도하고, 더 관찰하고, 더 기도해야만 가능할 듯합니다.
하나님이 뜻에 대한 계시가 확실하다지만 모호한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럴때는 고집보단는 모험도 필요합니다. 마침 고넬료의 구원으로 인해 성령의 뜻을 확실히 알게된 저들은
행11:22~23)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발전은, 교회 발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가 기다가, 뛰둥거리며 걸음마를 배우고 끊임없는 호기심에
질문을 하며 커가듯이 이렇게 커갑니다.
잠시 후 안디옥의 성도들은 착한 사람, 바나바와 사도바울을 통해서 장성의 분량까지 발전했습니다.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행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이 안디옥 교회는 이방선교의 한 축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흩어진자들의 복음의 합당한 생활과 편견에서 벗어난 성령의 열매입니다.
고맙고 놀랍게도 피난 길의 그들은 자기네 살 걱정보다 순회전도자로 활동했습니다.
성령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빌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복음을 위한, 복음이 우선된, 복음이 영광되는 생활입니다.
현대의 성도들이 꼭 회복해야할, 성령으로 말미암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편견이 있었습니다.
행11:19)~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이들의 편견은 잘못이 아닙니다.
우주관과 역사관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우주관은 어땠을까요? 그 시대의 땅끝은 어디였을까요? 자신들이 살던 동네밖이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많이 출가한 것입니다.
섬출신 모목사님은 우리나라의 땅끝 섬을 세상끝으로 여겨 그 섬을 찾아 7년간 목회하였다가, 눈이 밝아져 부천에서 개척을 하던 중 중국도 보게 되어 나를 방문했습니다.
연길의 조선족 목사님께는 땅끝이 북한이랍니다.
이게 억지가 아니고 마음대로 되질 않습니다. 우주와 역사관과 밀접합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사관은 학교교육에서 형성되곤하는데 무신론적이고 진화론적 바탕의 사관입니다.
이 교육과 성경적 교육관의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까운 국가는 일본입니다. 지난 식민지국가 백성으로서 앙금이 남아있습니다.
미국사람이라고 부른데 비해 일본 놈이라하며 쪽바리라고 비하합니다. 모든 스포츠경기에선 꼭 이겨야만 됩니다. 그러다보니 선교사가 적습니다. 우상이 가장 심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공산국가하면 북한이 우선 떠오릅니다.
6,25때 받은 상처들이 남아있던 70년대까지는 반공과 방첩이 국시였기에 선교는 생각도 않했습니다.
당연한 편견입니다.
유대주의에 충만했던, 흩어진 성도들이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은 바로 이런 편견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용기있고, 반칙도 한 몇몇사람들 탓에 헬라인들에게도 복음 증거가 일어났습니다.
행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이 일은 성령의 뜻과도 부합되어
행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더라
우리의 편견이 얼마나 모순이던지요?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지요?
우리는 이 모습에서 새로운 시각의 필요를 깨닫습니다.
그 시각의 주체는 나, 우리가 아닌 성령이어야 합니다.
더 공부하고, 더 시도하고, 더 관찰하고, 더 기도해야만 가능할 듯합니다.
하나님이 뜻에 대한 계시가 확실하다지만 모호한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럴때는 고집보단는 모험도 필요합니다. 마침 고넬료의 구원으로 인해 성령의 뜻을 확실히 알게된 저들은
행11:22~23)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발전은, 교회 발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가 기다가, 뛰둥거리며 걸음마를 배우고 끊임없는 호기심에
질문을 하며 커가듯이 이렇게 커갑니다.
잠시 후 안디옥의 성도들은 착한 사람, 바나바와 사도바울을 통해서 장성의 분량까지 발전했습니다.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행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이 안디옥 교회는 이방선교의 한 축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흩어진자들의 복음의 합당한 생활과 편견에서 벗어난 성령의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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