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에게로, 행2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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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생애의 가장 어처구니 없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보병이 호위하고 마병이 호송하는,
행23:31~32) 보병이 명을 받은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이튿날 마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뿐만아니라 헤롯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행23:35) 가로되 너를 송사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라 하고 헤롯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보병의 호위, 마병의 호송, 헤롯궁에 머뭄 등은, 언뜻보면 호강 같고 출세한 듯합니다. 사실은 그러할지라도 진실은 송사를 위한 첫발걸음입니다. 이 시작의 마침은 로마에서 황제의 판결로 이어지고 순교까지 이어집니다. 그동안 그는 자유를 상실했습니다. 미결수의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행24:27) 이태를 지나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문득 이 모습에서 우리 독립투사들의 고생 모습을 엿볼수 있었습니다. 통치가 생명인 하나님나라나 영토와 주권이 세움받는 세상나라나, 건국의 투쟁사는 같아보였기 때문입니다.
의친왕은 독립의지가 남달랐습니다. 안창호선생은 의친왕인 이강을 상해로 망명시키려 했습니다. 왕손의 망명은 일제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을 주고 독립투사들과 국내의 백성에게는 희망을 주고자한 계략이였습니다.
변장을 한 의친왕는 인력거를 타고 궁을 빠져나와, 수색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 건너 단둥에서
상해행 배를 타고자했습니다. 그러나 의친왕이 사라진 일제의 검거에 항구 150m지점에서 잡혔습니다.
이때 만약을 대비해 독립자금을 든 수행원은 뒤따라오게 했는데, 결국 의친왕만 잡힌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 궁에서 연금된체 살았습니다. 이러한 때를 상상하면 숨이 막힙니다.
지금은 상해를 너무 쉽게 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힘들게 돌아다녔습니다.
상해는 어떤가요? "훅" 하는 더운공기가 폐속으로 들어오는 곳입니다. 타국입니다. 저들의 궁핍은 어떠했나요?
그럼에도 '대한독립'을 위했던 것입니다. 지금 저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 독립과 자유는 지금도 있습니다.
열렬히 환영하는 헤롯궁의 입성이 아니기에 '밤'에, 바울을 옮겨야했습니다. 죽이고자하는 무리의 간계를 감지했기에, 비교적 경비가 좋을 헤롯궁으로 호송했던 것입니다.
어디든지 처음부터 길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다니다보니 길이 되었고, 마차도 다니니 신작로가 되었고,
마침내 아스팔트 길도 되었습니다. 언젠가 그 길을 처음으로 간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선각자이고 개척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복음적 생활은, 바울의 이 고생으로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깨지고 잡히고 죽기까지했던 이 나라의
선교사들과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소망했을까요? 왜 자신들의 안락은 초개처럼 버려야 했을까요?
단12:3)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속물된 이 세상에서, 이를 벗어나 지혜있는 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다는 일은, 그래서 별과 같이 비췸을 얻는 일은 고매합니다. 영적이지 않고는 가능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처자를 위해서, 국가나 이념을 위해서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한 일은 더한 일입니다.
최고의 일입니다. 그럼에도 못하고 않되는 일입니다. 이런 바울의 바탕은,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아~ 우리네와 얼마나 다른지요?
풍성한 예수, 위로해 주시는 예수, 형통케 하시는 예수, 내뜻대로 잘이루워 주는 예수만 믿고 있습니다.
아닌가요? 이쯤되니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가오리다."는 그치고, "존귀영광 모든 권세 내가 홀로 받으리다" 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모 서체연구소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친일파들의 서체를 연구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서체가 힘있고 강직했으며 글자간의 틈이 없었습니다. 친일파들은 그 반대였습니다.
여유작작했습니다. 서체는 기질이고 성품인 셈입니다.
성도의 찬송도 비슷합니다. 시대적 신앙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와 고백과 서원과 결단이 올리워지떤 때의 찬송가가 있습니다. 부흥의 시대였습니다. 그렇지않은 경우는 어떨까요? 감정적이나 감상적으로 치우쳐 있지 않나요? 쇠퇴와 연관되지는 않았을까요?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선각자이기에 복음개척자의 길을 이처럼 갔습니다.
행23:35) 가로되 너를 송사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보병이 호위하고 마병이 호송하는,
행23:31~32) 보병이 명을 받은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이튿날 마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뿐만아니라 헤롯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행23:35) 가로되 너를 송사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라 하고 헤롯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보병의 호위, 마병의 호송, 헤롯궁에 머뭄 등은, 언뜻보면 호강 같고 출세한 듯합니다. 사실은 그러할지라도 진실은 송사를 위한 첫발걸음입니다. 이 시작의 마침은 로마에서 황제의 판결로 이어지고 순교까지 이어집니다. 그동안 그는 자유를 상실했습니다. 미결수의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행24:27) 이태를 지나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문득 이 모습에서 우리 독립투사들의 고생 모습을 엿볼수 있었습니다. 통치가 생명인 하나님나라나 영토와 주권이 세움받는 세상나라나, 건국의 투쟁사는 같아보였기 때문입니다.
의친왕은 독립의지가 남달랐습니다. 안창호선생은 의친왕인 이강을 상해로 망명시키려 했습니다. 왕손의 망명은 일제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을 주고 독립투사들과 국내의 백성에게는 희망을 주고자한 계략이였습니다.
변장을 한 의친왕는 인력거를 타고 궁을 빠져나와, 수색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 건너 단둥에서
상해행 배를 타고자했습니다. 그러나 의친왕이 사라진 일제의 검거에 항구 150m지점에서 잡혔습니다.
이때 만약을 대비해 독립자금을 든 수행원은 뒤따라오게 했는데, 결국 의친왕만 잡힌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 궁에서 연금된체 살았습니다. 이러한 때를 상상하면 숨이 막힙니다.
지금은 상해를 너무 쉽게 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힘들게 돌아다녔습니다.
상해는 어떤가요? "훅" 하는 더운공기가 폐속으로 들어오는 곳입니다. 타국입니다. 저들의 궁핍은 어떠했나요?
그럼에도 '대한독립'을 위했던 것입니다. 지금 저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 독립과 자유는 지금도 있습니다.
열렬히 환영하는 헤롯궁의 입성이 아니기에 '밤'에, 바울을 옮겨야했습니다. 죽이고자하는 무리의 간계를 감지했기에, 비교적 경비가 좋을 헤롯궁으로 호송했던 것입니다.
어디든지 처음부터 길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다니다보니 길이 되었고, 마차도 다니니 신작로가 되었고,
마침내 아스팔트 길도 되었습니다. 언젠가 그 길을 처음으로 간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선각자이고 개척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복음적 생활은, 바울의 이 고생으로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깨지고 잡히고 죽기까지했던 이 나라의
선교사들과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소망했을까요? 왜 자신들의 안락은 초개처럼 버려야 했을까요?
단12:3)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속물된 이 세상에서, 이를 벗어나 지혜있는 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다는 일은, 그래서 별과 같이 비췸을 얻는 일은 고매합니다. 영적이지 않고는 가능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처자를 위해서, 국가나 이념을 위해서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한 일은 더한 일입니다.
최고의 일입니다. 그럼에도 못하고 않되는 일입니다. 이런 바울의 바탕은,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아~ 우리네와 얼마나 다른지요?
풍성한 예수, 위로해 주시는 예수, 형통케 하시는 예수, 내뜻대로 잘이루워 주는 예수만 믿고 있습니다.
아닌가요? 이쯤되니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가오리다."는 그치고, "존귀영광 모든 권세 내가 홀로 받으리다" 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모 서체연구소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친일파들의 서체를 연구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서체가 힘있고 강직했으며 글자간의 틈이 없었습니다. 친일파들은 그 반대였습니다.
여유작작했습니다. 서체는 기질이고 성품인 셈입니다.
성도의 찬송도 비슷합니다. 시대적 신앙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와 고백과 서원과 결단이 올리워지떤 때의 찬송가가 있습니다. 부흥의 시대였습니다. 그렇지않은 경우는 어떨까요? 감정적이나 감상적으로 치우쳐 있지 않나요? 쇠퇴와 연관되지는 않았을까요?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선각자이기에 복음개척자의 길을 이처럼 갔습니다.
행23:35) 가로되 너를 송사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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