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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립바왕 앞에서, 행25:13~27 > 나의간증

아그립바왕 앞에서, 행25: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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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4-07-22 15:46 조회 2,35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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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말을 이곳저곳에서 반복해 한다는 자체는 곤혹스런 일입니다.
아들아이는 군대에서 많이 아팠습니다. 그 증세를 가는 곳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해야 했습니다.
모 장로님의 간증은 귀합니다. 그럼에도 반복되는 말이 난처하답니다. 바울은 자신의 무죄와 주님을 만난 사건을 반복해서 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상황이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못해지니 변론에도 한계를 느꼈을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은, 처음에는 바울의 사건을 악행의 사건으로 알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고자했으니
그랬을 것입니다. 행25:18~19)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라

그랬다면 바울을 옳게 판결하여 석방했어야 했을텐데, 그는 우리 주의 무죄를 알고도 석방치 않고 유대인들에게 넘겨 준 빌라도와 같이 처신했습니다. 다만 자신의 입장에서 난처한 고민이 되어 엉거주춤 할 때에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방문하자 그들에게 이 사안을 내놓고 지혜를 구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행25:20~21)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베스도총독은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밑에 있으면 일 잘하는 부하들은 고생합니다. 사건을 귀찮아 하는 타입이기에 일을 만들어서 하지도 않고 주어진 일도 대충하여 시간만 때우길 고집하는 리더입니다.
적패를 몰고오는 부패한 관료주의의 전형적인 상입니다. 만약 민간기업 같으면 이처럼 대강의, 요령주의가 될 수없습니다. 망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 우리나라도 낯설지 않은 모습입니다. 공기업의 운영이 적자가 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대통령이 국가혁신을 한다는 의미도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베스도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행25: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의를 베풀고 와서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신문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그러나 이 역시도 결코 바울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황제의 판결을 신청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자신의 면피용이었습니다. 그리고 행정절차였을 뿐입니다. 행25:26) 그에게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왕 당신 앞에 그를 내어 세웠나이다

그럼에도 바울을 세운 또 이유가 또 있다면 '재미용'이었을 것입니다. 찾아준 상전과 가까워야 할 "성중의 높은 사람들" 에게 '볼거리'를 제공할 필요였을 것입니다. 사람갖고 장난치는 일은 천인공노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당시는 유행 아니었나요? 북한에는 아직도 이 장난질이 있으며, 우리의 진보들은 거꾸러된 짝퉁 진보라서 그런지 저들 인권에만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고 있음을, 정녕 알아야 합니다. 그 결국을,

불쌍한 바울은 결박된체 끌려나왔습니다. 행26:29)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
그러나 바울은 기죽지 않았습니다. 타협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반복되는 말을 할지언정, 복음 전도의 기회로 작정했습니다.

깡패와 신사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강한 사람이 이깁니다. 강한 사람은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 아닌가요?
바울이 그랬을 것입니다. 영화로 만든다면 지금 이 장면은 멋진 장면 아닐까요?
마귀는 바로왕을 앞세워 3세 이하의 영아들을 죽이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그 때도 왕을 두려워하지 않는 산파들과 믿음의 모세 부모를 통해서 모세를 지키셨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유대교와 총독을 통해 바울을 죽이고자했으나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역공을 하고 계십니다.
몇대 몇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가 바울 편이시기에 지는 듯해도 결국은 이깁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위기에 봉착하곤 합니다. 대체로 나의 부덕의 소치인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처럼, 복음을 위한  곤란은 없다시피 합니다. 현대 성도들은 번영신학에 빠져서 잘되고 물질도 많아야만 은혜라고 치부하는데 모순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바울은 지지리 복도 없는 사람이고 그의 믿음은 쪽박믿음 이 됩니다. 과연 그런가요? 고후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농부가 옷에 흙 묻는것과 얼굴이 볕에 그을린 것이 싫으면 농사짓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당장의 소득을 보려면 장사를 해야합니다. 이와 같이 진정한 복음의 일군에게 고난은 기본입니다.
신앙의 변질은 고난을 두려워하여 기피함에서 옵니다. 우리의 상급은 '당장' 이 아닌 '훗날' 입니다.
바울은 이 언약을 믿었습니다. 나중에 나옵니다만 아그립바왕 앞에서도 당당히 외쳤습니다. 부럽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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