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얻으니라, 행27:2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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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굴라 광풍은 심각했습니다. 행27: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위기때의 모습이 그 사람의 참모습이 보입니다.
프로들은 능력을 발휘합니다. 행27: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쫒겨가더니
프로의 능력이 통할 때도 있지만 속수무책인 경우가 더많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다릅니다. 행27: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라
요나가 탔던 배에서도 그랬습니다. 선원들은 짐을 바다에 빠트렸으나 요나는 자신이 책임을 졌습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라" 변명이나 원망이 없이 책임만 있었습니다. 문제의 이유를 자신의 불의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어설픈 프로나 어설픈 의인은 선동하고 선전합니다. "야당이 협조하지 않아 못했다." "대통령이 소통하지 않아 그렇다." 정말 그럴까요?
바울은 안심을 시켰습니다. 행27:34)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바울의 확신과 친절은 에너지가 넘쳐서가 아닙니다. 그도 남들처럼 고난중에 있었습니다. 그 배에 함께 있었습니다. 더욱이 죄수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계시를 믿었습니다. 사고와 사건이 많은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받은 주의 계시는 성경만큼 확실한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계시를 외면하고 뉴스와 정보와 구설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줏대도 없거니와 참 의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환난 날에, 환난 받는 때에, 자신이 아닌 남을 향하는 친절이야 말로 참 의가 아닌가요?
주님의 섬김입니다. 진정한 십자가의 도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는 이 성품과 이 자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목사도 장로도 사회적 프로이긴 보다 의인이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보십시오, 바울 한사람으로 인하여 276명이 살게 되었습니다. 행27:35~37)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 칠십륙이러라
방배동의 모교회 얘기를 소속총회장으로 부터 들었습니다. 교회가 재산이 있다보니 목사 반대파와 찬성파로
나뉘어져 소송을 하며, 심지어는 목사반대파에게 '예배방해금지및 접근금지 신청'도 했는데 예배방해금지만 받아들여졌답니다. 더 유감스러운 것은 반대파는 저쪽 총회라고 하여 지시를 받고, 찬성파는 이쪽 총회의 지시를 받고 행동한답니다. 내가 생각하기론 싸움이 오래 갑니다. 그리고 결국 돈싸움입니다. 재산이 원수입니다.
양쪽 교인들은 다 상처투성이고 주의 영광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만약 가난한 교회였어도 양쪽 총회가 관심과 개입을 했을까? 교인들이 그처럼 양분되었을까? 주는 어디에 계실까? 자문해 보았습니다.
교회가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 불랙홀이 된 것입니다. 목사의 잘못으로 형제같던 교인들이, 따로 국밥이 되었습니다. 의인의 부족입니다. 주의 계시에 귀기울리지 않은 탓입니다. 교회재산이 내것 되나요?
여기 광풍에서 주의 계시대로 산 이들은 새로운 묘책을 강구했습니다. 행27:39) 날이 새매 어느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 한 후
의논이 주의 감동이나 계시를 앞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중지를 모으는데 필요하곤 합니다.
서울의 모대형교회는 추수감사주일때 무슨 떡을 하느냐? 팥떡이냐? 백설기냐? 로 제직회때 대판 싸운 후
떡문제를 내놓지않는 답니다. 명심할 것은 교회는 회의 보다는 기도회와 성경공부와 예배가 대세여야 합니다.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교회의 구별법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하한 주의 은혜와 바울의 경건한 영향력과 백부장의 반성과 죄수들의 애씀으로 모두가 살았습니다.
행27: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우리나라 신안 앞바다와 군산 앞바다에서는 청자등이 나옵니다. 청나라로 혹은 한양으로 수송하다가
좌파된 것입니다. 이 유물들은 지금의 본문처럼 살기 위해 애썼을 당대의 상인과 선원들의 죽음흔적입니다.
바다는 속절없이 출렁이어도 본문은 이 슬픔과 아픔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위기때의 모습이 그 사람의 참모습이 보입니다.
프로들은 능력을 발휘합니다. 행27: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쫒겨가더니
프로의 능력이 통할 때도 있지만 속수무책인 경우가 더많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다릅니다. 행27: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라
요나가 탔던 배에서도 그랬습니다. 선원들은 짐을 바다에 빠트렸으나 요나는 자신이 책임을 졌습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라" 변명이나 원망이 없이 책임만 있었습니다. 문제의 이유를 자신의 불의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어설픈 프로나 어설픈 의인은 선동하고 선전합니다. "야당이 협조하지 않아 못했다." "대통령이 소통하지 않아 그렇다." 정말 그럴까요?
바울은 안심을 시켰습니다. 행27:34)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바울의 확신과 친절은 에너지가 넘쳐서가 아닙니다. 그도 남들처럼 고난중에 있었습니다. 그 배에 함께 있었습니다. 더욱이 죄수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계시를 믿었습니다. 사고와 사건이 많은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받은 주의 계시는 성경만큼 확실한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계시를 외면하고 뉴스와 정보와 구설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줏대도 없거니와 참 의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환난 날에, 환난 받는 때에, 자신이 아닌 남을 향하는 친절이야 말로 참 의가 아닌가요?
주님의 섬김입니다. 진정한 십자가의 도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는 이 성품과 이 자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목사도 장로도 사회적 프로이긴 보다 의인이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보십시오, 바울 한사람으로 인하여 276명이 살게 되었습니다. 행27:35~37)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 칠십륙이러라
방배동의 모교회 얘기를 소속총회장으로 부터 들었습니다. 교회가 재산이 있다보니 목사 반대파와 찬성파로
나뉘어져 소송을 하며, 심지어는 목사반대파에게 '예배방해금지및 접근금지 신청'도 했는데 예배방해금지만 받아들여졌답니다. 더 유감스러운 것은 반대파는 저쪽 총회라고 하여 지시를 받고, 찬성파는 이쪽 총회의 지시를 받고 행동한답니다. 내가 생각하기론 싸움이 오래 갑니다. 그리고 결국 돈싸움입니다. 재산이 원수입니다.
양쪽 교인들은 다 상처투성이고 주의 영광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만약 가난한 교회였어도 양쪽 총회가 관심과 개입을 했을까? 교인들이 그처럼 양분되었을까? 주는 어디에 계실까? 자문해 보았습니다.
교회가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 불랙홀이 된 것입니다. 목사의 잘못으로 형제같던 교인들이, 따로 국밥이 되었습니다. 의인의 부족입니다. 주의 계시에 귀기울리지 않은 탓입니다. 교회재산이 내것 되나요?
여기 광풍에서 주의 계시대로 산 이들은 새로운 묘책을 강구했습니다. 행27:39) 날이 새매 어느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 한 후
의논이 주의 감동이나 계시를 앞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중지를 모으는데 필요하곤 합니다.
서울의 모대형교회는 추수감사주일때 무슨 떡을 하느냐? 팥떡이냐? 백설기냐? 로 제직회때 대판 싸운 후
떡문제를 내놓지않는 답니다. 명심할 것은 교회는 회의 보다는 기도회와 성경공부와 예배가 대세여야 합니다.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교회의 구별법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하한 주의 은혜와 바울의 경건한 영향력과 백부장의 반성과 죄수들의 애씀으로 모두가 살았습니다.
행27: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우리나라 신안 앞바다와 군산 앞바다에서는 청자등이 나옵니다. 청나라로 혹은 한양으로 수송하다가
좌파된 것입니다. 이 유물들은 지금의 본문처럼 살기 위해 애썼을 당대의 상인과 선원들의 죽음흔적입니다.
바다는 속절없이 출렁이어도 본문은 이 슬픔과 아픔까지 끌어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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