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받는 요나, 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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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 앱 중에 '요기요.' 가 있습니다.
식당에서 종업원을 부를 때 흔히 쓰는 말입니다. "요기요, 반찬 좀 더 주세요" 등,
앱의 이름이 기막히다 생각했습니다.
요나,,아밋대의 아들 이름이지만 선교사의 이름으론 기막힙니다.
'비둘기'라는 이름이라니, 자라면서는 조롱받았을 것이고, 철난 후에는 부담을 가졌을 듯 합니다.
내 아이들의 이름이 그런 경우인데, 제 3자가 들어도, 딱하니 알만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어릴적부터 별명이 "예수~"였다니,,부모 좋아 작명한 것이 애들에게는 짐이었나 봅니다.
요나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듯합니다.
그래서 독수리나 부엉이가 아닌 비둘기 였습니다.
노아가 홍수 후에 날려보냈더니 감람잎을 물고 온, 제물로 드려진,
요즘은 도시의 비둘기가 닭둘기라 해서 천덕꾸러기가 되었지만, 성경의 비둘기는 순결한 동물이었습니다.
주님도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하셨으니 알만 합니다.
그러나 이 요나는 내게, 우리 성도들에게는 '요,,,나' 입니다.
"요기요." 한 것처럼, 요나의 신앙변천은 요,,,나요, 그리고 뭇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요나서에서는, 우리 모두의 민낯이 고스란히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명받는 요나, 도망가는 요나, 하나님께 잡히는 요나, 회개하는 요나, 순종하는 요나, 그럼에도
뜻을 모르는 요나,
우리 모두에게는 주를 만난 변곡점이 있습니다.
획기적이던 아니던, 그래서 사도바울은 "너희가 전에는" 했고 , "이제는"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에는 죄의 노예였고, 이제는 주 안에서 왕노릇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복음을 전해 준 이가 있습니다.
그가 누구이든, 내게는 하나님이 보내준 비둘기인 셈입니다.
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줄이면, 너는 일어나 가서 외치라, 다 동사입니다.
이 덕에 내가 빛을 만났고 광명을 얻었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조용기목사님은 폐병으로 입원치료 중에 있을 때 어느 여학생이 성경을 전해 준 것을 읽고 회심했습니다.
아들이 복음성가 가수가 된 선배목사님도, 야외놀이 중에 외국인이 전해 준 쪽성경을 읽고 회심했습니다.
복음을 듣는 환경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전하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 역시도 누군가가에서 앞서 복음을 들은 이였습니다.
요나가 이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이 사명자입니다.
그런데 반응은 정반대입니다.
3절)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 갔더니,,
하나님이 생각한 성도인 내가 있다면, 내가 생각한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참 경건은 하나님께 나를 맞추고 드림인데, 말은 그렇다해도 이미 종교인이 되었기에 하나님이 내게
맞추어주길 구합니다.
여기서 부터 어긋장이 납니다.
선교사 요나가 관광객 요나가 된 것입니다.
"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그러나 그 본심은 불안하여 " ~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가장된 평안, 혹은 과장된 안정의 모습인데, 참으로 그 안에는 안식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의 하나님을 보십시오.
4절)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요나를 추적하십니다.
우리 중의 많은 변고는 하나님의 추적일 수 있습니다.
"돌아 오라'' ''깨달아라'' 는,,
세상에는 3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믿고 혹은 보고 깨닫고 알아서 기는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어느 집이든 형제들 중에 대체로 2째나 3째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앞선 자의 모양을 보고 눈치로 배웁니다.
실컨 맞고 죽으면서도 모르는 미련퉁이 부류가 있고,
맞아야 비로서 깨닫는 부류가 있습니다.
내가 그렇고 요나가 그렇습니다. 아마 다수가 여기에 해당될 듯합니다.
한 지인은 잘나가는 사업가요, 겸임교수요, 지역 유지였습니다.
고용했던 여직원이 횡령한 것 때문에, 어찌어찌하다 적반하장으로 감옥에 있습니다.
"그동안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였는데, 이곳에서 비로서 기도하며 성경을 보니,," 그의 고백이랍니다.
그의 부인은 가장의 이런 변화를 보며" "그동안의 우리 기도가 응답되었구나.." 했답니다.
요나는 이 대풍이라는 위기와 문제와 사건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9절)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하고"
재미있는 것은 선장은 요나의 신분을 물었는데, 요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아야 자신을 압니다. 그래야 자신의 할 바를 짐작(?)하게 됩니다.
이 첫장의 제목이 '사명받는 요나' 입니다.
자신을 모르는데서 온 하늘의 명령인 까닭인데, 여기에는 자원함이 없습니다.
사람만큼 변화가 어려운 존재가 있을까요?
너무 긴듯하여 여기서 마칩니다.
식당에서 종업원을 부를 때 흔히 쓰는 말입니다. "요기요, 반찬 좀 더 주세요" 등,
앱의 이름이 기막히다 생각했습니다.
요나,,아밋대의 아들 이름이지만 선교사의 이름으론 기막힙니다.
'비둘기'라는 이름이라니, 자라면서는 조롱받았을 것이고, 철난 후에는 부담을 가졌을 듯 합니다.
내 아이들의 이름이 그런 경우인데, 제 3자가 들어도, 딱하니 알만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어릴적부터 별명이 "예수~"였다니,,부모 좋아 작명한 것이 애들에게는 짐이었나 봅니다.
요나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듯합니다.
그래서 독수리나 부엉이가 아닌 비둘기 였습니다.
노아가 홍수 후에 날려보냈더니 감람잎을 물고 온, 제물로 드려진,
요즘은 도시의 비둘기가 닭둘기라 해서 천덕꾸러기가 되었지만, 성경의 비둘기는 순결한 동물이었습니다.
주님도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하셨으니 알만 합니다.
그러나 이 요나는 내게, 우리 성도들에게는 '요,,,나' 입니다.
"요기요." 한 것처럼, 요나의 신앙변천은 요,,,나요, 그리고 뭇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요나서에서는, 우리 모두의 민낯이 고스란히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명받는 요나, 도망가는 요나, 하나님께 잡히는 요나, 회개하는 요나, 순종하는 요나, 그럼에도
뜻을 모르는 요나,
우리 모두에게는 주를 만난 변곡점이 있습니다.
획기적이던 아니던, 그래서 사도바울은 "너희가 전에는" 했고 , "이제는"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에는 죄의 노예였고, 이제는 주 안에서 왕노릇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복음을 전해 준 이가 있습니다.
그가 누구이든, 내게는 하나님이 보내준 비둘기인 셈입니다.
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줄이면, 너는 일어나 가서 외치라, 다 동사입니다.
이 덕에 내가 빛을 만났고 광명을 얻었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조용기목사님은 폐병으로 입원치료 중에 있을 때 어느 여학생이 성경을 전해 준 것을 읽고 회심했습니다.
아들이 복음성가 가수가 된 선배목사님도, 야외놀이 중에 외국인이 전해 준 쪽성경을 읽고 회심했습니다.
복음을 듣는 환경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전하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 역시도 누군가가에서 앞서 복음을 들은 이였습니다.
요나가 이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이 사명자입니다.
그런데 반응은 정반대입니다.
3절)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 갔더니,,
하나님이 생각한 성도인 내가 있다면, 내가 생각한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참 경건은 하나님께 나를 맞추고 드림인데, 말은 그렇다해도 이미 종교인이 되었기에 하나님이 내게
맞추어주길 구합니다.
여기서 부터 어긋장이 납니다.
선교사 요나가 관광객 요나가 된 것입니다.
"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그러나 그 본심은 불안하여 " ~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가장된 평안, 혹은 과장된 안정의 모습인데, 참으로 그 안에는 안식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의 하나님을 보십시오.
4절)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요나를 추적하십니다.
우리 중의 많은 변고는 하나님의 추적일 수 있습니다.
"돌아 오라'' ''깨달아라'' 는,,
세상에는 3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믿고 혹은 보고 깨닫고 알아서 기는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어느 집이든 형제들 중에 대체로 2째나 3째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앞선 자의 모양을 보고 눈치로 배웁니다.
실컨 맞고 죽으면서도 모르는 미련퉁이 부류가 있고,
맞아야 비로서 깨닫는 부류가 있습니다.
내가 그렇고 요나가 그렇습니다. 아마 다수가 여기에 해당될 듯합니다.
한 지인은 잘나가는 사업가요, 겸임교수요, 지역 유지였습니다.
고용했던 여직원이 횡령한 것 때문에, 어찌어찌하다 적반하장으로 감옥에 있습니다.
"그동안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였는데, 이곳에서 비로서 기도하며 성경을 보니,," 그의 고백이랍니다.
그의 부인은 가장의 이런 변화를 보며" "그동안의 우리 기도가 응답되었구나.." 했답니다.
요나는 이 대풍이라는 위기와 문제와 사건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9절)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하고"
재미있는 것은 선장은 요나의 신분을 물었는데, 요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아야 자신을 압니다. 그래야 자신의 할 바를 짐작(?)하게 됩니다.
이 첫장의 제목이 '사명받는 요나' 입니다.
자신을 모르는데서 온 하늘의 명령인 까닭인데, 여기에는 자원함이 없습니다.
사람만큼 변화가 어려운 존재가 있을까요?
너무 긴듯하여 여기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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