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는 요나, 욘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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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에게 닥친 대풍은, 위기는, 문제는, 점점 커져갑니다.
"욘1: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선장은, 바다의 프로입니다만 그럼에도 그가 아마추어인 요나에게 물었습니다.
요나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는 교회가 세상을 어거하거나 염려하기는 커녕,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벗된 목사님이 최근 중동을 다녀 와 겪었던 일을 말씀하면서, " 아브다비를 갔었는데, 한국인 가이드가 이슬람의 일부다처제를 설명했어요. 그러면서 뭐라하냐면,, 그래도 개독보단 낫지요. 하더라고요. 허허!
빛이 어둠을 싫어하는 일은 예수님시대에도 있었지만,, 그 정도가 넘어섰더라고요."
다른 예는 우리 기독교에서 천주교로 많이 이동하고 있답니다.
그 이유는 천주교가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비교적 적기 때문이랍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그리고 기도하기를, " 주님 우리를 주의 보혈의 바다에 던져 주옵소서"
아직 우리에게 희망이 있음은, 배안으로 들어 온 바닷물을 퍼내는 개혁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바닷물, 이단의 바닷물, 불경건의 바닷물을 퍼내는 지속적인 개혁이,,
요나는 책임을 집니다.
12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다 나의 연고인줄을 아노라
놀랍지 않나요? 선장이나 선원에게 그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다. 운수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제비뽑힘을 부당하다며 항거하지 않습니다.
신앙을 떠나 요나는 상남자입니다.
그러나 남자의 자격에서만 상위가 아니라 신앙도 상위여야 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운운하니 뭇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영향력입니다. 누구는 나비효과를 말했지만, 틀린말 아닙니다.
성도 개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산다면, 그 나비효과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줄것입니다.
14절)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다 하고
16절)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하였더라
그 책임은 웅변력이 아니라, 요,,,나,,가 죽는 일입니다. 죽는 일은 반갑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러나 죽는 데는 말이 없습니다.
산다는 곳이, 산다는 데서 말이 많아 시끄럽습니다.
공동묘지는 언제나 침묵, 시장과 거리는 요란통인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진정한 요나가 되기 위해서는 옛 요,,나 가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얄팍한 지식과 이해와 경험과 알량한 자존심과 다시스에서 살고픈 욕망이 죽어야 합니다.
놀랍게도, 감사하게도, 그리고 아주 친절하게도 하나님은 죽는 일을, 관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17절)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주님은 이 사건을 자신의 죽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설죽은 체 살고자하여, 완전 살지도 않은 체 그래서 어정쩡한 체, 요나인 냥, 요나질을 하고
있나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잘죽는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되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는데, 이 은혜 안에 머문 상위성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성찰해 보면 얼마나 살고자하는 기도만 있는지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탓이고, 마귀는 이 죽음을 도구삼아 우리를 계속 죄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다시,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시는 주님께 전가해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어디서나 책임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다 내 탓이오."
개인적으론 이처럼 책임지는 요나가 훌륭히 여겨집니다. 우리 사회에 , 교회에 많아야 합니다.
책임지는 일과 직분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조차 책임을 회피해 갈등하고
분열되는 판국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주 안에서 죽는것 겁내지 맙시다. 참 요나가 되는 하나님의 방편이고,
주 안서 책임지는 것,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상위성도라는 증표랍니다.
"욘1: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선장은, 바다의 프로입니다만 그럼에도 그가 아마추어인 요나에게 물었습니다.
요나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는 교회가 세상을 어거하거나 염려하기는 커녕,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벗된 목사님이 최근 중동을 다녀 와 겪었던 일을 말씀하면서, " 아브다비를 갔었는데, 한국인 가이드가 이슬람의 일부다처제를 설명했어요. 그러면서 뭐라하냐면,, 그래도 개독보단 낫지요. 하더라고요. 허허!
빛이 어둠을 싫어하는 일은 예수님시대에도 있었지만,, 그 정도가 넘어섰더라고요."
다른 예는 우리 기독교에서 천주교로 많이 이동하고 있답니다.
그 이유는 천주교가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비교적 적기 때문이랍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그리고 기도하기를, " 주님 우리를 주의 보혈의 바다에 던져 주옵소서"
아직 우리에게 희망이 있음은, 배안으로 들어 온 바닷물을 퍼내는 개혁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바닷물, 이단의 바닷물, 불경건의 바닷물을 퍼내는 지속적인 개혁이,,
요나는 책임을 집니다.
12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다 나의 연고인줄을 아노라
놀랍지 않나요? 선장이나 선원에게 그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다. 운수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제비뽑힘을 부당하다며 항거하지 않습니다.
신앙을 떠나 요나는 상남자입니다.
그러나 남자의 자격에서만 상위가 아니라 신앙도 상위여야 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운운하니 뭇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영향력입니다. 누구는 나비효과를 말했지만, 틀린말 아닙니다.
성도 개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산다면, 그 나비효과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줄것입니다.
14절)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다 하고
16절)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하였더라
그 책임은 웅변력이 아니라, 요,,,나,,가 죽는 일입니다. 죽는 일은 반갑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러나 죽는 데는 말이 없습니다.
산다는 곳이, 산다는 데서 말이 많아 시끄럽습니다.
공동묘지는 언제나 침묵, 시장과 거리는 요란통인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진정한 요나가 되기 위해서는 옛 요,,나 가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얄팍한 지식과 이해와 경험과 알량한 자존심과 다시스에서 살고픈 욕망이 죽어야 합니다.
놀랍게도, 감사하게도, 그리고 아주 친절하게도 하나님은 죽는 일을, 관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17절)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주님은 이 사건을 자신의 죽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설죽은 체 살고자하여, 완전 살지도 않은 체 그래서 어정쩡한 체, 요나인 냥, 요나질을 하고
있나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잘죽는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되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는데, 이 은혜 안에 머문 상위성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성찰해 보면 얼마나 살고자하는 기도만 있는지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탓이고, 마귀는 이 죽음을 도구삼아 우리를 계속 죄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다시,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시는 주님께 전가해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어디서나 책임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다 내 탓이오."
개인적으론 이처럼 책임지는 요나가 훌륭히 여겨집니다. 우리 사회에 , 교회에 많아야 합니다.
책임지는 일과 직분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조차 책임을 회피해 갈등하고
분열되는 판국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주 안에서 죽는것 겁내지 맙시다. 참 요나가 되는 하나님의 방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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